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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움 Jun 20. 2023

10. 숙성

따뜻함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거실에서 자고 있던 시연이 답답한 듯 침낭의 지퍼를 거칠게 내렸다. 테라스 창으로 햇살이 마구 쏟아져 시연의 머리 위로 내리 꽂혔다. 눈을 감은 채 몸을 움직여 그늘을 찾은 시연이 대자로 뻗어 다시 잠들었다. 한가한 일요일 낮이었다. 

“시연씨! 일어났어요?” 

현관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더니 곧 벨이 울렸다. 시연이 찡그린 얼굴로 한쪽 눈만 뜬 채 월패드를 바라봤다. 화면에 리암의 얼굴이 크게 나왔다. 시연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 저기... 무슨 일이에요? 잠깐... 잠깐만요!”

시연이 당황하여 문을 열지 않은 채 월패드 앞에 서서 물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엉망이었다.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헝클어진 머리를 빠르게 정돈했다. 시연이 잠시 숨을 고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연락 없이 미안해요. 근데 나 지금 좀 무겁거든요.”

리암이 어깨에 큰 가방을 메고 양손에 작은 가방 여러 개를 들고 서 있었다. 시연이 얼른 문을 활짝 열었다. 

“이게 다 뭐예요?” 

리암이 망설임 없이 테라스로 가자 시연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선물이요. 그리고 아까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한참 기다리다가 올라온 거예요.” 

리암이 테라스에 짐을 내려놓고 시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리암이 가방에서 물건들을 꺼내 조립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캠핑의자를 만들어서 시연의 앞에 놓았다. 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리암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외가에 갔는데 안 쓰는 캠핑용품이 많아서 가져왔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캠핑 마니아시거든요. 앉아 봐요.”

리암의 설명에 시연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리암이 하나 더 조립하여 옆에 놓고 나란히 앉았다. 

“시연씨 햇빛 좋아하니까. 쉬는 날엔 여기 앉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시연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리암을 빤히 바라봤다. 리암이 긴장한 채 시연의 반응을 기다렸다. 시연이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의자가 너무 편해요.”

시연이 희미한 미소를 짓자 리암이 긴장을 풀고 다른 가방을 열었다. 부품을 꺼내 능숙하게 조립하자 금세 테이블이 되었다. 리암이 가방에서 캠핑용 컵, 식기, 조명 등 다양한 소품들을 계속 꺼내자, 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이거 할아버지 꺼 다 털어온 거 같은데요?”

“아니, 나는 의자만 가져오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계속 담으시더라고요.”

리암이 덩달아 웃으며 시연을 쳐다봤다. 

“아! 가장 중요한 게 있어요. 이건 내꺼.” 

리암이 보냉가방에서 커다란 반찬통을 꺼내 시연에게 내밀었다. 시연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리암을 바라봤다.

“갈비찜이에요. 밥 안 먹었죠?” 

리암이 의기양양하게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시연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리암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진오가 별의 가방을 들고 분주하게 집안을 돌아다녔다. 욕실에서 수건과 칫솔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별이 옷 다 입었어? 이따 쉬 마려우면 그 여... 엄. 마.  한테 꼭 얘기해.”

별이 입을 삐쭉이며 바닥에 앉아 양말을 신었다. 진오가 답답한 듯 양말을 신겨 주려하자 별이 발을 빼고 돌아앉았다. 

“시간 없는데, 빨리 신어.”

진오가 창밖을 내다보다 대문 앞에 서 있던 하영과 눈이 마주쳤다. 진오가 못 본 척 고개를 얼른 돌려버렸다. 양말을 다 신은 별이 기분 좋은지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가자, 가자!”

현관을 나온 별이 하영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하영이 별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별이 안녕! 오늘 너무 예쁘다.”

하영의 말에 별이 관찰하듯 하영을 빤히 쳐다봤다. 진오가 하영에게 인사하듯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어주었다. 하영이 들어오지 않고 별에게 두 팔을 벌렸다. 별이 진오와 하영을 번갈아 보다 쭈뼛쭈뼛 하영에게 다가갔다. 하영이 조심스럽게 별을 안아주었다. 진오는 하영의 품에 안겨있는 별을 보고 심통이 났다. 

“혹시 쉬 쌀 수도 있어서 수건이랑 물티슈, 팬티 넣어놨어요. 별이 좋아하는 인형도 넣고.”

진오가 별이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말하자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늦지 않게 올게요. 별이, 아빠한테 인사하자!”

하영의 말에 별이 진오를 빤히 쳐다보고 다시 하영을 바라봤다. 

“오늘은 엄마랑 별이만 놀러 갈 거야. ‘아빠 이따 만나요’하자.” 

별이 한 손을 활짝 펴서 진오에게 흔들었다. 진오가 복잡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별이 하영을 따라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갔다. 진오는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여정의 집으로 뛰어갔다. 


캠핑 테이블 위에 갈비찜과 김치, 밥이 차려졌다. 시연이 갈비찜의 국물을 떠먹었다. 

“엄청 맛있어요.”

시연이 놀란 듯 말하자 잔뜩 긴장했던 리암이 안심한 듯 의자에 기댔다. 

“입에 맞아서 다행이에요. 어제부터 얼마나 걱정되던지, 잠도 잘 못 잤어요. 이런 거 싫어하면 어쩌나, 간이 입에 맞을까? 갈비는 좋아하나...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니까요.”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갈비를 맛있게 뜯었다. 리암이 흐뭇하게 웃으며 시연의 밥 위에 김치를 올려주었다. 

“이건 우리 할머니 손맛이에요.” 

“같이 먹어요. 나만 먹으면 민망하니까.”

리암이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으나 시연이 갈비 하나를 집어 리암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러곤 밥과 김치를 떠서 한 입에 넣었다. 

“김장김치 오랜만이에요. 음... 행복하다.”

양볼 가득 채운 시연이 오물오물 씹으며 눈을 감았다. 


진오가 여정의 거실에서 불안한 듯 왔다 갔다 했다. 

“아유, 정신없어. 여기 좀 앉아.” 

여정이 소파에 앉아 진오를 올려다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진오가 여정을 돌아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에 여정이 애써 미소 짓자, 진오가 여정의 옆에 앉았다. 

“나 너무 허전해. 불안하고... 별이 다치면 어떡하지? 그 여자가 때리면 어떡해? 영영 안 오면? 그 여자가 안 데리고 올 수도 있잖아! 아... 따라갈 걸 그랬나 봐.” 

여정이 한숨을 내쉬고 진오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등 펴고 천천히 숨 좀 쉬어봐. 크게 들이쉬고... 내 쉬고...”

여정의 말에 진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벌떡 일어났다. 

“쫓아가 봐야겠어!”

“어디 간 줄 알고? 믿고 기다려봐. 괜히 별이 모녀 좋은 시간 방해하지 말고.”

진오가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지 말고 나랑 산책이나 가자.”

“애들이랑 가. 진가도 있고 리암이도 있잖아.”

“진가는 요새 유튜버 하느라 바쁘고 리암이는 데이트하느라 바쁘고.”

“데이트? 누구랑?”

진오가 의외라는 듯 여정을 쳐다보다가 생각난 듯 입을 쩍 벌렸다. 


“커피는 나도 할 수 있는데, 얻어먹기만 해서... 너무 좋은데요?”

시연이 리암이 건넨 커피잔을 받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리암이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좀 행복한 거 같아요.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좋고,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좋고, 해줬는데 좋아해 줘서 더 좋고. 살면서 이런 적은 거의 없었거든요. 시연씨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리암의 물음에 시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시연이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글쎄요. 우리 엄마는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사람들한테 보여지는 모습과 경제적 안정이 중요한 사람이었죠. 아빠는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시연씨는 아빠를 닮았네요?” 

리암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시연이 쓸쓸하게 끄덕였다. 

“엄마는 만족하지 못했죠. 성에 차지 않았거든요. 아빠도, 나도. 삶의 가치 기준이 달랐던 건데, 엄마는 강했고 사회적인 가치 기준을 따르는 분이었고. 우리는 엄마한테 무능하고 예민하고 사회화가 덜 된 답답한 인간이었어요. 아빠는 결국 스스로 삶을 멈추셨고 저는 든든했던 제 편을 잃었죠. 그때가 고등학생 때였어요.” 

당황한 리암이 어쩔 줄 몰라했다. 시연이 리암의 시선을 피해 하늘을 바라보고 기지개를 켰다. 

“안아줘도 돼요?”

리암이 시연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리암을 돌아보는 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1편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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