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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거 Aug 22. 2024

신생아/영아 시기 자녀에게 교육이 필요할까?

 

혹시 국민(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배우는 '바른생활' 교과서를 아는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그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게 옳다고 믿었고, 세상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바른생활 교과서가 도덕교과서로 바뀌고, 더 이상 도덕교과서를 보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될수록, 이러한 내 삶의 방식이 나를 '반골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바른생활'이라고 배워서, 그렇게 살았는데,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반골'소리를 들으며 산다는 것이(그리고 그 삶의 절정은 '군대'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의견이지만 '군대가 체질이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군 생활을 잘한다'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솔직한 나의 평가는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평가받을지언정, 굉장히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행스럽게도(?)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할수록 나도 바른생활 교과서와는 다른 삶들에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그 '반골기질'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뜬금없이 웬 반골 타령이냐?라고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니, 설명하자면, 프롤로그에서 밝혔던 나의 가치관과 더불어 나의 반골적 성향을 알고 있다면, 오늘의 글과 더불어 앞으로의 내 글들을 조금은 더 쉽게 읽을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적어보았다.


  육아를 시작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교육들이 상당하고, 나는 이 '교육'에 대해 의문을 상당히 많이 가진다. 특히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하는 교육(예를 들면 '수면교육')에는 의문을 넘어 거부감까지 가지고 있다. 신생아 또는 영아시기의 자녀에게 '교육'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생아 시기는 물론 영아기까지도 아이들은 정말 본능에 가까운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실제로 숲 이를 만나고 함께 생활하면서 더욱더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무의식'이 지배한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이 '무의식'을 바탕으로 굉장한 '애착'이 형성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애착 형성'이라고 보고, 그렇기에 부모는 '아이들이 죽을힘을 향해 표현하는 욕구들을 최선을 다해서 충족'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이 어필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함(의식주)과 태아시절부터 느꼈던 애착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운다. 그런데 수유텀을 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이들의 울음을 교정해 가며 일정한 패턴을 만드는 게 옳은 일인가?? 

 아이들은  안아달라며 잠투정을 부린다. 그런데 자꾸 안아주면 등센서가 생기니 안아서 재우는 버릇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게 맞는 건가?


 내가 '생각한다'라는 문구를 특히 많이 쓰는 이유는 말 그대로 내 생각이고, 이를 무조건 옳다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서이다. 그래서 나는 또 생각한다. 이 시기 아이들의 인지발달상 '교육'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이는 교육이라 표현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이들의 본능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에 가깝다고(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리고 이 인위적인 조정은 분명 아이의 긍정적인 애착 형성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결국 이 부정적인

애착형성이 아이와 부모의 삶을 힘겹게 할 거라고.


 지금까지는 쓴 글은 정답이 아닌 '온전한 개인적인 내 의견'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쓸 내용은 정답에 굉장히 가까운(?)내용이는 이 부분부터는 유의 깊게 봐주길 바란다.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하면서 가장 해서는 안될 언행(생각)중 하나가 '너를 위해서'라는 표현이다. 실제를 '너를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란 이들은 눈치를 많이 보는 경우가 많고, 심할 경우 부모에 대한 원망과 본인의 행동에 대한 자책을 이중감정으로 동시에 느끼는 경우가 많으며, 이것들은 자연스럽게 자존감 형성의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우리 솔직해져 보자.'너를 위해서'가 맞는지 부모인 '나를 위해서'가 맞는지, 백번 양보해서 순화된 표현으로 바꾸자면 '자식인 네가 잘되면 부모인 내가 좋으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너를 위해서'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부모들은 그 말을 하는 순간 '자녀보다 본인 중심'인 경우가 훨씬 많다.

 '부모인 나를 위해서'가 나는 나쁜 표현이라고 생각 안 한다. 그리고 절대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를 위해서야'라고 자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부담 주는 것은 흔히 요즘 유행하는 말로 굉장한 '가스라이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녀에게 솔직하게 말해주자 '부모인 나를 위해서'라고 그리고,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본인이 떳떳하지 못한 상황인 거니 절대 '너를 위해서'라는 표현으로 자식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자.


 다시 신생아/영아 육아로 돌아와서, 다양한 교육들(수유텀, 수면교육 등)이 '자녀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솔직히 '부모인 내가 편하려고'가 크지는 않은지.


 다시 이야기하지만 나는 절대 부모가 편한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부모가 심신의 안정이 있어야 아이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줄 수 있는 건 분명하고, 이 '큰 사랑'은 부모와 자녀 간 그 어떤 애착 형성보다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부모가 편하기 위함'인데 그것을 '자녀를 위해서'라고 잘못 생각하고 표현하는 경우이다. 이럴 경우 자식을 양육할수록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감정이 들 것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리고 이 감정이 자녀와 부모 모두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는 굳이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겪어본 사람들은 아주 잘 알 것이다.


 나는 나의 육아방식에 대해 '숲이를 위해서'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 

 내 육아 방식이 옳은지 아닌지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부정적인 요소보다 긍정적인 요소에 집중하며 '내가 편안함'을 느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야만 육아 중 '숲이의 비언어적인 요청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육아에 대한 내 신념과 행동을 수시로 수정하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양육에 있어 '훈육'은 중요하지만 '체벌'은 있어선 안되고, '버릇없이 키우는 것'은 안되지만, 그렇다고 '애정과 안정감'을 주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 양육방식이 방법론적로는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숲이를 낳아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으로 숲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임을 잊지 않고, 그렇다면 부모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삶'을 살겠다는 본질적인 마음가짐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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