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월요일, 대망의 출국일 아침이 밝았다.
원래 계획은 이러했다. 출국 전날에 짐 싸는 것을 완료한 채 당일에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을 먹고, 느긋하게 동네 산책도 하며 마지막으로 빠트린 건 없는지 확인도 하는 그런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는 것. 그러나 전날에 다른 일정을 치르고 늦게 귀가했었던 터라, 밀려오는 피곤함과 온몸을 짓누르는 귀찮음으로 결국 짐 꾸리는 것을 그다음 날로 미루었던 나였다. 일어나자마자 그런 결정을 내린 어제의 나를 원망했다. 그리고 얼마 후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잠이 덜 깨서 그런가 보다 하고 어제 미뤘던 짐 싸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잠 깨는 데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정신이 흐릿하고, 머리는 띵하고, 콧물은 줄줄 흐르고, 재채기가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고, 온몸의 근육이 뻐근했다. 무엇인가가 잘못됐음을 느꼈지만 이건 감기몸살 초기 증상이 아니라 그냥 컨디션이 조금 안 좋거나 아직 잠이 덜 깬 거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이게 진짜 감기몸살이라면 이따가 저녁 비행기를 타고 방콕에 내려 다음날 아침까지 공항에서 밤을 새우고 다시 치앙마이행 비행기를 탄 다음 체크인 시간인 오후 2시까지 숙소 바깥을 방황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려나 했지만 몸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예상치 못했던 출국일이 시작되었다.
이 상황을 들은 친구는 몸 상태가 그 지경인데 무슨 비행기를 타냐며 항공권 변경 수수료를 어느 정도 내더라도 출국일을 며칠 미루라는 아주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조언이 전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공기 출발 지연이나 연착이면 몰라도 건강 이상이란 변수를 전혀 상정하지 않았던 나는 기존의 계획대로 오늘 출국하고 내일 치앙마이에 도착해서 행복한 한 달 살기를 시작하는 것이 당연히 예정된 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볍게 그 조언을 무시했다. 그리고 아까의 현실부정의 연장선상에서 이 상황의 해결방안으로 병원이 아닌 약국으로 갔고, 내 증상을 들은 약사는 14,000원 치에 달하는 세 종류의 감기약을 권유했다. 권유받은 모든 감기약을 구매하며 이건 좀 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이 정도면 며칠은 어떻게 넘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약국에서 감기약을 타고난 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루치기 백반을 먹으러 단골 식당에 갔다. 요 근래 무섭게 치솟고 있는 물가 상승폭에도 불구하고, 푸짐한 돼지 두루치기 한 접시에 식당 어머님이 손수 만드신 반찬 대여섯 가지와 직접 농사지으신 쌈채소, 그리고 꽃게 반 마리에 바지락까지 들어간 진한 된장찌개를 모두 합해 8,000원에 먹을 수 있는 아주 고마운 식당이었다. 다행히 입맛은 그대로 살아있었는지 마지막 밥 한 톨까지 맛있게 싹싹 먹어치웠다. 아까 타온 감기약까지 먹으니 곧 괜찮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남은 짐을 마저 쌌다.
집에서 출발하기로 한 오후 4시 30분 직전까지 배낭 하나와 크로스백 하나에 모든 짐을 쑤셔 넣었다. 어떤 짐을 싸도 항상 느끼는 무언가 빠트린 듯한 찜찜함을 애써 무시하며 급하게 집에서 나왔다. 다행히 몸 상태는 아침에 비해 훨씬 호전된 것 같았다. 가장 급했던 짐도 일단은 다 챙겼고, 예정된 시간에도 나왔고, 컨디션도 그런대로 괜찮아지니 이제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기 시작됐다. 오랜만에 타는 국제선 비행기인데 허둥대지 않고 잘 탈 수 있을지, 처음 가보는 태국인데 입국심사는 문제없을지, 수완나품 공항이 그렇게 크다는데 밤샐 곳이나 국내선 환승할 곳은 잘 찾을 수 있을지, 치앙마이행 국내선 비행기는 무료 기내수하물이 7kg까지만 가능한데 혹시나 지적당하면 어떻게 대처할지 등을 생각하며 지하철을 두 번 환승하고 김해공항역에 내렸다.
공항 근처 환전소에서 1,000밧 정도만 환전을 하고 김해공항 국제선 청사에 도착하니 오후 5시 40분경이었다. 비행기 탑승 시각은 오후 8시 30분이라 남은 시간은 너무나 넉넉했다. 전날에 모바일 체크인도 미리 해놨고 위탁 수하물도 따로 없어서 추가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바로 탑승 수속을 밟긴 그래서 괜히 공항 한쪽에 비치되어 있는 저울에 가지고 온 짐 무게도 재보고, 2층도 올라가 보고, 화장실도 가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6시 전이었다. 딱히 더 할 게 없어서 출국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