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2년 차에 접어들던 어느 가을날, 지방 사시던 남자친구 부모님이 집안 행사가 있어 서울 근교로 오신다고 했다. 집안 행사는 바로, 남자친구 조카의 돌잔치.
십수 년 전만 해도, 돌잔치는 결혼식 다음가는 큰 행사였다. 많은 부부들이, 결혼이라는 관문을 넘어 2세를 출산한 후, 아기가 건강하다고 온 집안에 알리는 행사. 남자친구는 조카의 돌잔치에 당연히 참석해야 했고, 이 기회에 여자친구인 나를 부모님께 소개하고 싶어 했다.
후년 정도에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쿨하게 동행하기로 하고, 어린 마음에 남자 친구 부모님께 잘 보이고자 곱게 화장하고 옷도 신경 써서 입었다. 당시 대기업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더 이상 단정할 수 없는" 차림으로 그분들(현 시부모님)을 만났는데....
엄마가 내 아들의 친구를 처음 만나면, 밝게 웃으며 "아이고 반갑구나, 친하게 지내라" 하시는 게 정석 아닌가? 그런데 왜 이 엄마는 나를 보는 표정과 몸짓에 힘이 들어가 있지? 왜 나를 자꾸 관찰하는 것 같지?괜히 주눅이 들고 내 마음이 작아졌다. 많은 돌잔치가 그러하듯, 뷔페형식의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음식을 뜨는 순간부터 입에 넣기까지의내 모든 행동이 스캔당하고있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급기야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저 끝 테이블에 앉아 계시는 집안의 어른께 인사를 하자며 재킷을 걸치라고 하셨다. 블라우스와 정장치마차림에 겉옷으로 트렌치코트를 입고 왔던 나는, 굳이 겉옷을 입을 필요성을 못 느끼고 블라우스 차림 그대로 일어섰다.그랬더니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억지로 입고 왔던 트렌치코트를 걸치게 하시더니 그것도 모자라 목 끝까지 올라오게 단추를 채우게 하시고는 누군지 모르는 분께 나를 데리고 가셨다.그때 인사드린 분이 누구신지, 지금도 당최 알 길이 없다.왜 굳이 내 예쁜 실크 블라우스 위에 트렌치코트를 빗장처럼 걸어 잠그고, 남자친구도 없이 그의 엄마가 나만 데리고 덜렁 인사를 시켜야 했는지 아직도 모를 일이다.
이 즈음에서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저 모든 상황에서 남자친구는 어디에 있었길래? 여자친구가 관찰당하고 있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으면 그 상황을 전환시켜야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아닌가?
여자친구가 자기 엄마에게 굳이 겉옷 입힘을 당하고, 본인도 잘 모르는 친척에게 끌려(?) 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남자친구(현 남편)는 결코 효자가 아니다.연애시절에도 지방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뵌 건 명절 때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따로 엄마랑 알콩달콩 통화를 길게 하는 살가운 막내아들이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자친구가 본인 엄마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구출해 내는 능력은당연히 가져야 하는 센스 아니냐고!
덜 예민하여 상황 파악이 안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많은 드라마나 영화들에서 남편의 어리석은 중재역할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걸 보면, 자기 엄마와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된 남자만이 평탄한 결혼생활(특히, 아내와 본가와의 관계)이 보장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본인의 엄마가 본인과불편하지 않은 관계일 때, 엄마의 부당한 언행에 대해 자연스레 지적할 수가 있다. 엄마가 무섭거나, 어린 시절 어떤 식의 학대를 당했을 경우, 엄마의 잘못된 행동도 못 본 척 넘길 수 있다(=방관할 수 있다)는 사실, 그랬을때 피해자는 본인의 아내가 될 수 있다는 것...
예비 신부나 막 결혼한 유부녀들은 알 필요가 있겠다.
십수년도 더 된 연애시절 남편의 태도에, 나는 아직도 불쑥 화가 난다. 남편이 이 상황 자체를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것은화를 더욱 돋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하려고 한다.
남편의 유년기는 고달팠고 부모님(특히 엄마)은 무섭기만 한 존재였다. 본인과도 어려운 관계인데 아내와 본인 엄마와의 관계도 쉬울 리가없겠지. 스스로도 엄마와불편한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아내와 본인 엄마와의 관계에 개입하여 무언가를 바로잡을 당위성을 남편은 찾질 못하겠구나.
그러니, 수많은 에피소드로 상처받은 내 마음을 남편을 향한 원망으로 향하게 하지 말고, 덜 사랑받았던 유년의 그를 오히려 위로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