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섭식장애 사춘기 소녀를 키우는 맘으로... 미성년자 제외한 다른 식구(우리 집의 경우, 남편이 해당)의 식사까지 챙기는 건 좀 힘이 든다.
남편은 정말 밥을 좋아한다. 밥을 얼마나 좋아하냐면, 주말 아침에 늦잠 자다가 행여우리 집 아침식사 시간인 8시를 놓칠까봐, 그 전날 아무리 늦게 잤더라도 일찍 기상해서 아침식탁에 앉는다. 늘어지게 자다가 점심 먹을 즈음 일어나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세끼 먹을 수 있는 주말의 소중한 한 끼를 스킵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심지어 올빼미형 인간인데도, 식욕이 수면욕을 가뿐히 이긴다. 밥 한 그릇 뚝딱 하고 두 그릇 뚝딱 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한마디 한다. "깔끔하게 자알 먹었다!"
내가 1년간 섭식장애 아이의 식사에 집중을 하다 보니, 남편 식사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퇴사 전에는 당연히 본인 먹을 건 스스로 챙겨 먹는 식이었는데, 지난해부터 내가 집에 있으면서 아이에게 신경을 몰아 쓰며 끼니를 챙기다 보니, 상대적으로 남편에겐 더 소홀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는 있겠다.
성인은 스스로를챙기는 게 기본이라 생각하므로, 남편이 느낄 서운함은 애써 외면하곤 하지만, 자꾸 이 남자가 간접적으로 "밥"타령한다는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느 토요일 오전, 볼일이 있어 세 식구 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진진이가 점심으로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오랜만에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한 거라, 너무 기쁘게 "그래그래, 엄마가 해줄게!"대답했는데, 운전하던 남편이 옆에서 한마디 한다.
"나는?"
"나는?"이란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나는 뭐 줄 거야? 나도 밥 먹고 싶어. 나도 김치볶음밥 해줄 거야? 아니면 뭐 먹지?"
남편의 한마디에 나는 진이 빠진다.
내 의식의 흐름은 이렇다.
1. 내가 언제 밥 안 챙겨줬어?
2.왜 매번 밥 밥 하는 거지? 아침도 잘 먹었잖아.
3. 밥돌씨, 나중에 퇴직해서 삼식이 되어서 하루종일 밥타령 하면 너무 싫겠다...
이렇게 마무리되고 마는 내 사고에도 문제는 있긴 하다. 나는 그리 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미 섭식장애 아이 식사 챙기느라 가족의 식사는 숙제처럼 자리 잡고 말았다. 그래서 식사 준비는 좀 피로하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아이 입에 뭘 먹이느냐가 500배는 더 중요한 상황에서, 같은 선상에 있는 부모인 남편이 밥 밥 하는 것이 참 어리게 느껴진다.
아마 남편은, 내 관심이 아이에게만 쏠려서 더 밥타령을 하는듯하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자꾸 외면해 버리니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막내딸로 사랑받기만 하며 자랐는데, 나이 40줄이 넘어 딸도 남편도 서로 자기 더 사랑해 달라고 하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아이는 내가 낳았으니 온몸으로 사랑해 주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다 큰 남편은 어쩌란 말인가... 본인도 어릴 때 받지 못한 사랑을 나한테, '밥'을 매개로 달라 달라하고 있는 것 같으나 팍팍 주는 게 꺼려지는 내 마음은 어쩌란 말인지... 자꾸 당신 엄마한테 가서 사랑받아먹고 오라는 못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어찌 눌러야 할지 모르겠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남편이 밥돌이일 뿐, 다른 가사에 게으른 사람은 아니다. 내 퇴사 후에도 내가 버거워하는 많은 집안일을 해주고 있고,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놈의 밥'앞에서 나는 왜 이리 차가워지는지.... 나 스스로도 자꾸 돌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