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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담 Dec 18. 2024

말을 줄입시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상담사가 나에게 말했다.

"말을 줄이세요"


나 원 참.. 말까지 줄이라고?


뭐든 내 탓을 하는 상담사에게 불만이 치솟고 있던 터였다,


"아니 선생님. 자꾸 뭘 저한테 고쳐라 바꿔라 하세요?"


화가 버럭 났다.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남편과 아이에게 주로 어떤 말을 했던가..


남편에게는 대부분,


저녁은 뭐 먹었어? 누구랑 먹었어? 오늘도 바빴어? 등등 일상적인 체크. 이런 취조식 질문을 남편이 싫어하는 걸 알고 있다. 오히려, 주말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내년 휴가 때 어디 멀리 가볼까? 와 같은 "놀이", " 취미", "여행" 등을 주제로 삼는걸 그가 더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하루의 확인" 절차를 하게 된다. 확인을 하다 보면 잔소리로 발전하고 말이 길어진다.


진진이에게는,


오늘 학교는 재밌었어? 급식은 뭐 먹었어? 누구랑 먹었어? 저녁은 뭐 먹고 싶어? 역시나 일상의 확인 질문들. 마찬가지로 대화의 끝은 잔소리로 마무리될 때가 많다.


그래, 내 대화 습관을 바꿔보자,


마침 심윤경 작가의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게 되어, 그 책에서 해답을 찾았다.


할머니가 평생 한 말들의 80퍼센트는 단 열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려, 안 뒤야, 뒤얐어, 몰러, 워쩌'다. 표준어로 하자면 '그래, 안 돼, 됐어, 몰라, 어떡해'일 것이다. 나의 청중들은 청국장 냄새가 풀풀 풍길 것 같은 할머니의 사투리를 언제나 사랑했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p103


지금은 할머니의 허술한 '장혀 '가 바로 '과정을 칭찬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뭘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괴로운 시간을 견뎌낸 것이 장하다는 소중한 인정이었다. 부모님이 보기엔 겨우 빈둥거리고 신경질 부리면서 하루를 보냈을 뿐이지만 할머니가 보기엔 해야 할 많은 일들과 뜻대로 되지 않는 나 자신 사이에서 부대끼며 보낸 힘든 시간이었다. 나 자신도 만족스럽지 않았던 울퉁불퉁한 시간을 보낸 뒤에 할머니가 '장하다'라고 하시면 까칠했던 마음의 결이 나도 모르게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같은 책, p164


공감, 위로, 긍정의 몇 마디 만으로도 관계는 돈독해질 수 있다는 것. 좋은 일에 너무 크게 기뻐하지 말고, 나쁜 일에 너무 좌절하지도 말며, 그저 마음을 읽어주기만 하기.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한 시간 후에 과외를 해야 다며 시무룩한 아이에게, "아이고 장하다 우리 딸" 한마디를 건넸다. 눈이 동그래지는 진진.


"엄마, 내가 뭐가 장해?"


"학교 다니는 것도 힘든데 과외까지 하니까 장하지"


"엄마 괜찮아, 나 공부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뭘"


"공부 열심히 안 해도 학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장하다 딸아"


"응 엄마, 그건 그래.  학교에 있으면 선생님들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만날 말씀하셔서 엄청 피곤해. 그런데 심하진 않아"


"장하다"  격려의 한 마디로 이렇게 훈훈하게 대화가 진행되는 매직이란.


남편에게는,

아침식사시간에, "오늘도 늦어?"대신에, "내일 국은 어떤 거 해줄까? 매일 같은 거 먹으면 지겨울 것 같네" 해봤다. 아침을 차려주긴 하지만, 반찬가게에서 산 반찬과 국을 차려내기만 하는 거라, 늘 마음 한편이 좀 미안하던 터. "뭐, 따끈하게 잘 넘어가니 뭐든 괜찮아"라는 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굳이 관심이랍시고 남편과 아이의 하루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구나. 그냥 내가 해 줄 수 있는 선에서 그들의 일상을 도와주고 최소한의 말로 응원만 해 주면 되는 거였구나.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내 탓만 하는 상담사가 야속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개선해서 좋아질 수만 있다면야. 늘 노력하는 가족 구성원이 되련다.


*이 후로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세 번 더 완독하고 필사까지 했습니다. 복잡하기만 하던 제 마음을 할머니의 묘사만으로 말끔하게 정리해 준 심윤경 작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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