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담 Dec 11. 2024

구경하기

예술 감상과 육아의 또 다른 방법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내 기억에 예체능 시간은 국영수 주요 과목에 시간을 많이 내어줘, 실제로 미술시간에 그림 한번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었는데, 한 학기에 몇 번씩 미술 수업을 하게 되면 선생님은 otp 필름에 그림을 잔뜩 담아 오셔서 칠판 화면으로 보여주셨다. 작가 설명도 해주고 그림의 기법 설명도 해 주신 듯한데, 늘 새로운 그림을 띄우면 제일 먼저 "구경해라"라고 하셨다.


구경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미술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저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색감에 대해 한 번씩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저 그림은 좀 어둡네', '이건 좀 눈이 환해지는 느낌이 난다' 정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원한 '구경'이 딱 저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굳이 그림의 작가가 누구이고, 어떤 화풍인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저 그림을 느끼면서 공부에 지친 아이들의 눈을 좀 쉬게 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 이후부터 구경한다는 말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고, 좋은 풍경을 구경하고,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내가 그 장면에 들어가 있지 않은 채, 한발 빼고 그저 바라보며 생각하는 것.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교향곡도 좋아하고 피아노나 바이올린 협주곡도 좋다.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베토벤은 어떤 곡이라도 선율과 웅장함이 동시에 느껴지고, 브람스는 거대하고, 차이코프스키는 수려하고, 모차르트는 경쾌하고. 감히 내가 어느 곡이 더 좋고 말고를 나열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곡들이 너무나 많다. 요즈음은 미디어를 통해 수십 년 전의 공연 실황도 직접 보면서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시간이 날 때마다 다양한 연주자, 지휘자 버전으로 음악을 듣곤 한다.


선율은 귀에 익은 것들이 많으니, 이제는 연주를 "구경한다".


베를린이며 빈, 아니면 뉴욕 등 좋은 공연장은 일단 세트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알록달록한 다양함이 아니라, 벽과 바닥의 소재는 반짝이고, 샹들리에는 화려한 와중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고 클래식한 통일감이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착석하면 목관악기와 금관악기가 무대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단원들의 검은 정장과 그들의 근엄한 표정도 반드시 따라온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움직여 음악이 시작되면, 선율을 타고 들이 몸을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물결 같다. 잘 차려진 무대 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내가 베토벤처럼 청력을 잃는다 해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협주곡에서 독주자들의 표정을 보면, 내가 절대 느낄 수 없는 음악적 심취를 저 연주자는 느끼고 있구나 싶어 질투가 날 정도이다.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 한 명 한 명의 표정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역시나 부럽다. 나는 이렇게 듣기만 할 뿐인데, 저들은 저 많은 음표를 다 알고 악기로 연주하고 있다니. 그래도 그 시샘이 크게 뻗어나가지 않고 이 정도의 감정만으로 끝난 후 듣고 또 듣고 하게 되니, 구경하는 것은 참 담백하다.




사춘기 아이를 '옆집 아이 대하듯' 해라는 선배 엄마들이 말이 들린다. '하숙생 대하듯' 하라고 하기도 한다. 그저 그들의 일상을 구경하라는 말 같다. 한 발짝 빼고 지켜보다가, 정말 위험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만 내밀어 주면 된다. 그림과 음악을 구경하듯, 그 시기 아이의 전두엽 움직임을 좀 지켜만 봐주면 그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바른 방향으로 자리 잡을 거라 믿으며.


예술을 구경하는 것은 쉬워도 우리 아이를 구경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테니, 아이에게서는 한 발짝 멀어진 채 그림과 음악을 더 많이 구경하며 내 마음을 단련해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