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 불안한 걸까?
수업이 휴강되거나 하여 오전 일정이 비게 되면, 손이 바빠진다. 그 시간에 보고 싶었던 영화는 없는지 검색하거나, 오랜만에 지인들과 브런치라도 할 약속을 잡는다. 그저 집에서 오전시간을 별 일 없이 보내는 게 이상하리만치 싫다.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면, '자기 관리를 잘한다', '부지런하다' 등,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온다.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도 내가 바쁘게 일상을 사는 모습을 지지하고 칭찬해 준다. 퇴사 이후 내 삶이 피폐해지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게 단점이 있다.
만약 별 큰 계획이 아니더라도, 내 생각과 달리 계획이 틀어지면 굉장히 기분이 상하고 만다. 10시 수업에 차가 밀려 10분 정도 늦으면, 강의실 들어가기 전부터 마음이 불편해진다. 10분 동안 뭐 그리 대단한 내용이 오고 갔을 리 없건만, 김이 새 버린다. 정해진 일정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건강 관리도 필수다. 수면장애가 있는 나는, 클래식 수업 전날 잠이 부족하면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다. 브루크너의 웅장한 음악을 또렷한 정신으로 감상하고 싶은데, 전날 잠을 잘 못 자면 선율을 본격적으로 느끼기도 전에 눈이 감길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 생활을 상담사에게 말하니,
"촘촘히 계획 세우는 것은 본인이 불안함 때문입니다. 좀 느슨해져도 괜찮아요."
라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반응이 돌아왔다. 매우 부정적인 말투였다.
그렇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저 나 좋자고 하는 일들인 것을. 늦으면 늦는 데로, 못 가면 못 가는 데로, 그냥 넘기면 될 것을 왜 나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지. 이 내 생활 패턴이 불안함 때문이었구나.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불안한 거지.
진진이의 사춘기가 극을 달할 10월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진진이는 하교 후 갑자기 1시간 후에 있을 수학 과외를 캔슬시키겠다고 했었다. 이유는 단지 "너무 피곤해서". 나는 "과외도 선생님과의 약속이니 당일, 그것도 한 시간 전 캔슬은 어려울 것 같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었고, 아이는 굉장히 분노했다. 다행히 과외 선생님이 도착하셔서는 진진이의 상태를 보시고, 오늘 수업은 다음번 보강으로 미루자고 양해해 주셨지만, 나도 진진이도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다.
뭐든 마음대로 하려는 아이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촘촘하게 수업 일정이 있는 걸 알기에 과외 선생님께도 너무 죄송스러웠다.
이 케이스를 상담사에게 말했을 때도, 상담사는 나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무엇이 불안하세요? 왜 아이 마음을 먼저 읽어주지 못하세요?"
나는 대답했다.
"과외 선생님께 죄송하기도 하고, 아이가 마음대로 하는 걸 다 허용해 줄 순 없지 않나요?"
상담사는 말한다.
"과외 선생님 기분이 상하는 일을 엄마가 할 수도 있죠. 더 중요한 건 아이의 마음입니다.
저 상황에서 바른 대답은,
"많이 피곤했구나. 과외하지 말지는 스스로 결정해라"
였단다.
상담사는, 아이가 과외를 하지 못하면 생기게 될 여파에 대해 오히려 내가 불안해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 스스로 공부를 하지도 않는데 과외마저 안 한다면 시험은 정말 '완전' 망칠 것 같다는 내 불안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내가 남들보다 불안함이 많고, 사서 걱정하는 스타일인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 아이와의 대화, 이 모든 것에서 내 불안함이 드러난다면 나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
내가 불안하면-> 계획에 집착하고 (남들을 의식하고)-> 계획이 틀어지면 더 예민해지고-> 이런 내 삶의 방식들이 주위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결국 아이가 힘들어진다. 이게 상담사의 분석이었다.
상담사의 말이 다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후에 상담사와 어떤 사건이 있기도 했고 (이 에피소드는 다음으로...) 상담사의 생각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참고하여 내 삶에 어느 정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좀 더 릴랙스 하고, 집에서 머무는 시간을 늘리고, 약속 시간에 일부러 좀 늦어도 보고, 내가 더 좋아하는 일들을 하고, 못하면 말고,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이런 내 삶을 가족과 공유하며 지냈다. 사실 크게 불안할 것도 없는 내 삶이라,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따를 거라는 막연한 불안조차 내려놓으려고 노력했다. 한 달여 지난 듯하다.
그랬더니 일단 내 표정이 밝아지고, 아이 표정도 밝아졌다. (남편은 요즘 사실 너무 바빠서ㅜㅜ 얼굴 마주칠 시간이 적네.) 엄마가 늘 분주하고 뭔가를 배우고 계획하는 그 모습이, 어쩌면 아이는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적당한 불안과 그것에서 비롯된 나만의 질서를 조금씩 확장시키며 안정된 마음을 갖는 것. 이게 나와 내 가족의 큰 과제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