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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중순이라는 나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떠올리며

by 소담

대학교 학부 전공이 국어국문학이었다. 그저 책 많이 읽고 세상을 깊게 배우고 싶다는,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포부를 갖고 정한 전공이었지만, 갓 스무 살의 내 젊음은 그리 진지한 모습은 아니었고 우리 학교 국문과는 문법과 고문학 중심이었기에 내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국문과랍시고 과방에는 다양한 시집과 소설책들이 있었는데, 그 시기 막 나온 신간 시집인 최영미 님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많은 신입생들의 손을 오고 갔다.

시 내용보다 제목이 더 와닿았다. 대학교 신입생에게 서른이란 나이는 너무 까마득해 보였고, 잔치가 끝나버린 서른 살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너무 어렸고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에, 나는 서른이란 숫자가 안정이나 방황의 끝 정도로 이해되었다.

막상 서른이 되어보니 나는 여전히 어른스러움을 갈망하고 있었고 역시나 미래는 불투명했다. 서른이 되면 잔치가 끝난다고 말한 시인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기도, 가끔 이유 없이 원망이 들기도 했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이 되는 10년보다 서른 살에서 마흔 살이 되는 10년이 훨씬 더 힘들었고, 과연 나에게 안정은 찾아오긴 하는 건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마흔을 넘기고 마흔 중순으로 가는 길은 과거 10년보다 이미 더 고되지만. 그 사이에 나는 깨닫고 있다. 인생에서 '안정'이란 단어는 너무나 상대적이고 절대로 객관화될 수 없다는 것을. 돌아보면 그렇게 평온했던 나의 유년기조차, 모든 순간은 방황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그저 나에게 오는 많은 사건과 다양한 사고들을 내 스타일로 정리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삶을 잘 살아가는 지혜란 것을.

삼십 대 중반 즈음이었나?
같은 부서 동료가 급작스럽게 남편상을 당한 적이 있다. 사인은 급성 백혈병에서 비롯한 패혈증이었다. 중학생 첫째와 초등학교 4학년 둘째가 동료와 함께 남았다. 함께 슬퍼했지만 내 삶과 동떨어졌다 느껴져 솔직히 크게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얘기를 가족들과 나누었는데, 엄마가 "그 동료 나이가 마흔은 넘었니?" 물어보셨다. "마흔 중반정도 되었어요" 했더니, "그럼 그나마 다행이다" 하셨다. 속으로, '나이가 뭐가 중요하지?' 생각했던 것 같다.

물음의 이유를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마흔 정도 되면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고 견뎌나가며 비로소 성인의 길에 접어들기 때문에, 인생에 큰 난관을 만나도 부딪혀 이겨낼 만할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예순이나 일흔 즈음의 어른들이 이 글을 읽으시면 비웃으실 수도 있겠지만, 40여 년의 시간이 쌓이다 보면, 그제야 제멋대로 겹겹이 쌓였던 마음이 단단하게 다져지기 시작하는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믿는다.
내 인생의 잔치는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언젠가 나에게 멋진 잔치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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