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과 교만
가진 것에 만족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도, 남의 것이 더 멋지고, 더 편하고, 더 좋아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 몹쓸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를 찾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광야의 삶은 40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40년으로 모든 것이 끝났던 사람들은, 모세보다도 먼저 죽어간 자들이었고, 그리고 모세까지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입성한 그들에게도 여전히 숙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광야의 연속
그들 앞에는 풀어야 할 고난의 문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삶도 ‘광야의 연속’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죽음의 강을 건너기까지, 그 고난의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말할 수 없이 교만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입니다. 완벽하기를 꿈꾸지만,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일찍이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너 자신을 알라.” 나는 이 말이 성경 말씀 이외에 또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한계와 처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 말은, 교만한 우리를 꼬집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완벽한 신정정치를 펼치던 시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서히 세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나라들을 보니, 그들에겐 선지자가 아니라 왕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을 주소서!”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왕이 될 처지도 아니었으면서, 왜 그토록 왕을 원했을까요? 그들 앞에 놓일 노역과 세금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왕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왕을 얻고 난 이후의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군주정치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초심을 잃은 왕이라니
굳이 자기들의 자유와 안위를 왕과 맞바꾸고자 한 자들에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요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바랐던 왕의 자격에 걸맞은 사람으로 사울이 지목되었습니다. 그가 왕의 자격을 얻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매력적인 외적 용모가 한몫을 했습니다.
물론, 초기에는 겸손의 덕목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지위는 겸손과 함께 오래 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왕이 되면 새사람이 되라.” “내가 함께하리라.” 하셨지만, 사울이 가진 아름다운 덕목들은 추앙과 교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서서히 무너져 갔습니다. (부조, 606~613)
수려한 외모와 위풍당당한 성격까지, 왕으로서 부족함 없이 모든 걸 갖춘 사울. 그렇기에, 사탄 또한 그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초심을 잃은 사울은 점점 무섭도록 교만해졌고, 결국에는 이성을 잃고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감히 하나님께 대적한 이 패역한 왕. 그는 어리석은 인간의 얕은 술수와 권모술수로 인해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사울만의 문제였을까요?그를 왕으로 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꿈과 희망 또한, 그렇게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그리고 그 어리석은 선택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후회스러운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공적을 성취하기 위해 비천한 인재를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대쟁투, 171).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획에 따라, 겸손한 초심을 가졌던 사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겸비한 농부였으며, 어느 정도 겸손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환경 속에서 겸손을 배우며 자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사울만은 아니었습니다.
겸손만이 살 길
종교 개혁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던 얀 후스도, 비천한 계급에서 태어났으며, 루터 또한 작센의 한 광부의 집에서 태어났고, 츠빙글리 역시 알프스 산중의 한 목자의 오두막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을 사용하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출발선에서는 조건이 같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겸비한 마음을 유지했던 사람들만이 인류를 위한 희망의 불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초심을 유지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견뎌낼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칭찬에 사로잡혀 교만해지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그러나, 커다란 업적을 이룬 뒤 찾아오는 영광을 스스로 받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 칭찬과 존경을 받는 그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의지하게 된다”(대쟁투, 169).
하나님께서 요한을 밧모섬에 감추시어 인류 역사 최고의 책,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셨듯이, 루터 또한 바르트부르크의 깊은 산성에 감추시어 독일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암흑 속에서 고통받는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게 하시고, 마침내 종교 개혁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 그 공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제자 요한을 주목하거나 종교 개혁을 이룬 루터를 주목하기 쉽지만, 루터는 자신을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루터의 그 정신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교만한 나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가끔 칭찬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칭찬에 취해, 그 영광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선택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어리석은 나. 그런 나 자신을 바로 알기 위해, 나는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바르트부르크의 깊은 산성에 루터를 감추셨던 그 마음을 나는 오늘, 깊이 헤아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