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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일 Jan 10. 2019

제18회 - 뮤지컬의 예술성과 오락성 (2)

제18회 - 뮤지컬의 예술성과 오락성 (2)

 뮤지컬의 그 시작은 어떠했을까? 뮤지컬 역사도 강의하는 나는 뮤지컬의 역사를 다룰 때 그 영향을 준 오페레타 때문에 르네상스의 오페라를 다루고, 그 오페라를 태동시킨 카메라타(Camerata)의 정신적 지주인 그리스의 문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서 고대 연극으로부터 흐르는 음악극 전통을 더듬어본다. 고대 그리스 연극으로부터 이어지는 음악극의 전통이 지금의 뮤지컬까지 흐르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뮤지컬은 미국 사회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앞서 본 에세이의 6회(그 편한 방법, MR)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의 뮤지컬을 형성한 요소가 영국의 작곡가와 작사가 파트너인 아더 시모어 설리반(Arthur S. Sullivan)과 작가 윌리엄 슈벵크 길버트(William Schwenck Gilbert)로 대표되는 오페레타뿐만은 아니었다. 다른 요소가 미국의 자생적인 오락들과 재즈인데, 그 미국의 자생적인 오락들은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는 미국 남부 노예였던 흑인들의 노래, 춤, 말씨를 흉내 내면서 관객을 웃게 만들었던 민스트럴 쇼, 잡다한 쇼를 모아놓은 버라이어티 쇼, 주로 쇼걸의 섹시함을 팔았던 벌레스크, 그나마 가족이 와서 관람할만했던 보드빌, 특정한 주제를 가지기 시작했던 레뷔 등이었다. 이 오락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뮤지컬의 탄생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예술성보다는 오락성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켰다. 미국 뮤지컬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 요소들은 예술 작품이라기보다는 오락거리였다. 그런데, 그 이후의 뮤지컬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어 왔을까? 어떤 변화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그 예술성을 목격하거나 그 소문을 듣고 있는 것일까? 뮤지컬을 형성하는데 미국의 자생적인 오락들이 기여했다고 해서 뮤지컬은 원래 오락이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 뮤지컬 역사의 흐름을 세계 역사를 배경으로 짧게 서술해본다. 아래 부분을 간직하고 있으면 미국 뮤지컬 역사의 흐름을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숨이 차겠지만 차근차근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학생들은 이 부분을 보고서 같은 곳에 그대로 베껴 옮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주시기를 당부한다. 이렇게 정리하는 것도 나름대로 공부를 했기에 가능했다.)    


 오페레타가 흘러들어왔고, 미국의 자생적인 오락들이 만들어지고, 그리고는 그동안 무르익어 왔던 재즈가 합류하려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는데 미국은 중립을 선포하고 그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독일이 봉쇄 해역에서는 중립국의 선박을 포함해 경고 없이 무차별적으로 잠수함으로 공격하여 격침시키겠다고 하자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여한다. 미국이 참여한 지 1년 7개월 만인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대전은 끝이 난다. 승전국이 된 미국은 국제사회에 등장하게 되고 1920년대를 재즈의 시대로 보낸다. 이때는 동시에 뮤지컬 코미디 시대이기도 했다. 그렇게 신나는 시절을 보내다가 1929년 10월 24일, 주식 시장이 붕괴되면서 대공황을 만나자 수많은 극장이 문을 닫는다. 침울하게 시작된 1930년대의 뮤지컬은 조금 철이 든 모습으로 사회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그 기간 동안 많은 작곡가와 작가가 실력과 경험을 쌓고 있었는데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이번에도 역시 처음에는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던 미국은 1942년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공격을 당하자 뒤늦게 전쟁에 참여한다. 자국 본토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아니었기에 그 전쟁 중에 그들의 본토에서는 뮤지컬의 황금기가 시작된다. 그리고는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난다. 그리고는 곧이어 냉전시대가 된다. 그 황금기 동안 뮤지컬은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며 예술성을 굳혀간다. 그 황금기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1950년대에 이르러 TV 시대가 열렸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락앤롤을 부르며 그 TV에 등장해서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구닥다리 음악과 줄거리가 나오는 뮤지컬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냉전의 살벌함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히스테리적인 움직임이 생겼다. 1960년대 중반이 되자 뮤지컬의 황금기는 끝이 났다. 황금기를 지나면서 그 시기를 이끌던 작곡가와 작사가들이 세상을 뜨거나 창작을 그만두었고, 뮤지컬을 즐기던 관객층이 늙어버렸다. 그즈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자 반전 시위도 벌어졌고 히피, 마약이 유행하고 여성의 권리에 대한 주장이 솟아올랐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1968년에는 헤어(Hair)와 같은 작품이 젊은이들을 다시 공연장에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1970년대를 맞이했고 그 시기는 브로드웨이의 위기라고 할 만큼 명작이 드물었다. 베트남 전쟁은 끝이 났지만 뮤지컬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즉 앤드류 로이드 웨버를 앞세운 영국의 뮤지컬이 뉴욕을 침공한 것이다. 1950년대부터 뉴욕의 자존심을 지켜온 스티븐 손드하임이 건재했지만 홀로 미국 뮤지컬의 자존심을 지키기에는 그 주위에 동지가 부족했다. 1980년대에는 공화당의 레이건이 강한 미국의 부활을 외치며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소련과 다시 긴장이 높아졌고 뮤지컬계는 여전히 영국의 뮤지컬과 경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제작비 상승으로 인해 장기 공연을 해야 수익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걸출한 안무가이자 연출가였던 이들이 약속한 듯 세상을 떠나고 대중은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그리고 MTV에 열광했다. 보수 정권은 이 광기를 체제를 위해 교묘하게 이용한다. 1990년대에는 후배 창작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더 복잡하고 다양해진 세계를 반영하는 작품들이 쏟아진다. 그러면서 디즈니사가 공연 뮤지컬에 손대기 시작하고 흑인들도 브로드웨이에서 당당하게 한몫을 한다. 2000년대는 여러분이 보고 느끼시는 그대로이다. 즉, 런던과 뉴욕이 아닌 다른 곳의 뮤지컬 작품과 시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글로벌 제작이 일반화되면서 뮤지컬이 점점 더 사업이-언제나 사업이었지만- 되어간다. 그리고 9.11 테러 사건으로 뮤지컬계를 포함한 미국의 모든 것들이 잠시 주춤한다.    


 미국의 재즈 역사, 뮤지컬 역사, 팝 음악의 역사의 그 초기는 서로 중복된다. 미국의 대중예술이 곧 재즈였고, 뮤지컬이었고, 음악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뮤지컬의 황금기가 끝나는 1960년 중반부터는 각자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팝 음악으로 대표되는 대중예술은 지금까지 대중예술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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