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 뮤지컬의 예술성과 오락성 (3)
우리는 뮤지컬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예술로 인식하고 있을까, 아니면 엔터테인먼트로 인식하고 있을까? 인터넷 검색 엔진 초기 시절에 나는 야후!(Yahoo!)나 익사이트(excite)를 이용했는데 그때 만해도 검색하고자 하는 단어를 입력하는 검색창이 없었다. 검색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상위 개념부터 찾아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뮤지컬을 검색해보려면 그 상위 개념을 선택해야 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야후는 예술(Arts)로, 익사이트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s)로 들어가야 했다. 나는 뮤지컬을 예술 분야의 하위 개념으로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제 뮤지컬 작품을 쓰는 나에게 뮤지컬은 나에게 관람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창작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엔터테인먼트로 접근하기보다는 예술로 접근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의 고집을 비웃기라고 하는 듯이, 20세기 후반 이후부터 대중들은 예술과 오락의 차이를 점점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한국 사회도 뮤지컬을 또 하나의 소비행위 옵션으로, 즉 엔터테인먼트로 생각하는 것 같다. 뮤지컬이 가지고 있는 오락성을 생각해본다면 그런 시각이 마냥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 얘기를 조금 더 들어주기를 바란다.
어떤 이는 굳이 뮤지컬을 예술이냐, 오락이냐로 판단할 필요가 있느냐면서 뮤지컬은 대중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중예술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는 이를 소개한다. 바로 미국의 문화역사학자인 모리스 버만(Morris Berman)이다. 모리스 버만은 자신의 저서 『미국 문화의 몰락(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심현식 옮김, (주)황금가지, 2002)을 통해 미국 사회의 몰락의 조짐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다. (실제로 지금의 미국 금융위기는 미국이라는 사회, 또는 자본주의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어왔던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는 현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하는 개념이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모든 각각의 가치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현대 사회가 진리를 부정하고 진지한 생각을 하는 것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한나 아렌트라는 사람의 말을 소개한다. “대중문화란 문화가 아니며 오락이고 사회가 이런 과정을 통해 문화적 발전을 이룬다는 발상은 치명적인 실수이다.” (이 말만 읽으면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위에 소개한 책을 전체적으로 읽으면 이해가 될 것이다. 위의 책을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 신나고 멋진 뮤지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루디거 베링(Rüdiger Bering)이 그의 책 『뮤지컬(Musicals-An illustrated historical overview)』(Barron's Educational Series, Inc, 1998)의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뮤지컬은 명백히 민간 극단의 시장 경향 시스템의 산물이며, 전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상업적 성공에 의해 존속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위의 책은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출판(김태은 옮김, 예경, 2005)되었지만 내가 번역한 것을 인용했다.) 뮤지컬이 상업주의, 자본주의를 근거로 생긴 오락이라면 금융위기와 같은 위기가 오면 뮤지컬도 함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뮤지컬은 앞으로도 상업과 자본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야 존속될 수 있는 양식일까? 상업적 성공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뮤지컬은 더 이상 제작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슬픈 이야기가 아닐까? 뮤지컬에 대해 조금 달리 접근한다면 방법은 있지 않을까?
연극이 언제나 배고픈 상황에서도 나온 예술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뮤지컬의 태생과 성장이 자본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뮤지컬을 연극이고 공연예술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수중에 돈이 그리 많지 않아도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조를 하는 작품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예술이라는 것이 예술가들에게 최대한 많은 자유를 허락할 때 명작이 나온다고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헝가리의 예술 사회학자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는 기념비적인 그의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백낙청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76)를 통해 그 점을 반박한다. (이 책은 1953년도 독일에서 발표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관련 분야의 훌륭한 교과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는 그 책의 고대/중세 편 제2장에서 고대 오리엔트 사회와 같이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혹독한 압제가 있었던 곳에서도 문명과 예술이 꽃피웠다는 것을 예를 들어 말한다. 예술가들은 자유가 주어지든 그렇지 않든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압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자 무엇이라도 만들어낸다. 척박한 땅에서도 어떻게든 생명을 이어가려도 싹을 내미는 잡초와 같이 말이다. 인간은 처절한 상황에서도 그 처절함을 놀이로서 표현해 낸다. 지금 우리 사회를 가장 힘들게 하는 전제군주와 같은 것이 무엇이던가? 돈이 아니던가? 경제적 풍요로움 자체가 예술의 풍요로움 자체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진보의 역설(The Progress Paradox)』(그레그 이스터브룩(Gregg Easterbrook), 박정숙 옮김, 에코 리브르, 2007)이나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經濟成長がなければ私たちは豊かになれないのだろうか)』(더글러스 러미스(Douglas Lummis), 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를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우리가 뮤지컬을 예술로 생각하고 접근한다면 자본주의, 소비주의, 황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속에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뮤지컬을 계속 이어갈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예술의 기능이기도 한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의 사회가 지금의 문제점 많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보다 살만한 경제체제를 발전시킨다면 자본주의에 기대어 존속하고 있는 뮤지컬은 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겠지만 어떤 자세로 뮤지컬이라는, 더 나아가 예술이라는 것을 유지해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본주의라는 것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예술은 존재했다. 사회주의 역시도 그들의 예술을 간직하고 그 수준을 유지했다.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처럼 자본주의도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도 생각해보자. 자본주의이고 사회주의이고 간에 요점은 뮤지컬을 예술로 접근해야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미국 문화의 몰락(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에서 모리스 버만은 또 영화 『화씨 9/11(Fahrenheit 9/11)』과 『식코(Sicko)』로 유명한 영화감독 마이클 프랜시스 무어(Michael Francis Moore)의 말을 인용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적 경제 체제란 자본주의라고 불리지도 않고 사회주의라고도 불리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고상하신 예술만이 순수 예술이고 그것이 뮤지컬이 지켜나가야 할 모습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시대에 그 무엇이 순수한가? 그 어떤 예술 장르가 순수하게 전시되고, 공연되고, 출판되고, 상영되는가? 순수예술인 척하는 것에 대한 좋은 예는 본 에세이의 6회(그 편한 방법, MR)에서 언급한 『뮤지킹-음악하기』에 잘 나와 있다. 저자 크리스토퍼 스몰은 서양의 클래식 음악이 속으로는 속물근성을 가지면서도 겉으로는 제3세계 음악이나 대중음악과는 다른 척한다고 폭로하면서 클래식 음악이 더 돈을 밝힌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오락을 대중‘예술’로 무조건 인정하기에는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오락이 대중예술이라는 호칭을 가지려고 하고 그럼으로써 예술과 오락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 시대에 뮤지컬의 자리가 어디쯤인지를 고민하자는 것이다.
다시 한국 뮤지컬계로 돌아와서 이야기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만들어 팔기 위해 시장의 흐름을 읽으면서 가장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팔릴 만한 상품을 기획한다. 트렌드. 그 잘난 트렌드. 나는 뮤지컬 제작에서 가장 위험한 함정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발상은 시각예술에 관련된 것에는 잘 들어맞는다. 그래서 TV광고는 세상의 흐름에 언제나 가장 빠르게 적응한다. 르네상스가 그랬듯이 일반적으로 한 시대의 반응이 가장 빠른 분야는 시각예술이고 그 다음이 문학예술이고 그 다음이 음악예술이고 그 다음이 종합예술인 공연예술이다. 그래서 오페라는 르네상스 후기의 산물이다. 연극은 언제나 시대의 반영을 가장 늦게 한다. 세상이 어떤 모습을 보이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을 묵묵히 짧지 않게 관찰한다.
뮤지컬이 넌뮤지컬(non-musical) 보다 창작과 제작 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해볼 때 뮤지컬은 처음 작품을 떠올리고 나서 공연으로 관객을 만날 때까지는 꽤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요즘 뭐가 뜬다더라 하고 작품을 만들면 그 작품이 공연될 즈음에는 그 뜨던 것은 이미 저물어 있다. 그래서 연극은 어떤 하나의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해답을 내리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에 감추어진 진실을 캐서 시대를 뛰어넘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이렇게 사는 거 괜찮은 것일까 하면서. 시대의 유행을 재빨리 읽고 그것을 이용해 상품을 만드는 것이 사업의 기본적 기획이지만 바로 그런 세상의 모습에 제동을 걸고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해보게 하는 것이 연극인 것이다. 그 아프고 진지한 이야기를 겉으로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며 즐겁게, 재미있게 드러내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면, 나는 작가로서 어떤 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때, 그것에 대해 작품을 쓰고 싶은 욕구가 충동적으로 생기곤 한다. 그러나 잠시 거리를 유지해본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술자리에서 열변을 토하며 이야기하면 기분이 풀리는 정도의 생각은 아닐까 하고. 그러다가 그 사건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러면 작품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늘 그렇지만 역시나 길을 걸을 때나, 운전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샤워를 할 때나,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때나, 심지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중에도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럴 때쯤이면 또 역시나 벌써 발 빠른 누군가가 그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틀림없는 작품을 공연하기 시작한다. 창작과 제작 기간을 합쳐봐야 불과 6개월 정도. 대부분의 그런 작품은 여지없이 나를 실망시킨다. 빨리 만들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라는 조급함에 정신줄을 놓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그들이 믿는 재미이고 관객들이 원하는 재미일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뮤지컬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예술이라면 뮤지컬은 대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일까? 오페라가 점점 고급화되고 귀족화 되면서 일반 대중을 버리고 음악인들이나 돈 있는 사람들끼리의 가족잔치가 되어버린 것처럼?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무엇을 근거로 작품을 창작하고 제작할 것인가?
예술의 한 속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미학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체계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예술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 예술은 그 자체에 오락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작품을 쓸 때도 그렇고, 내가 지도하는 사람들에게도 뮤지컬 작품을 쓸 때는 오락성보다는 예술성에 심혈을 기울이라고 한다. 오락성은 예술적 의도가 확고할수록 강화된다. 공연장에 오는 관객이 공연을 보면서 TV에서 나오는 소비적인 오락을 체험하고자 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오락을 다시 한번 보려고 값비싼 입장권을 사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복제 불가능한 성격으로 인해 비싼 입장권을 받는 것에 대해 당당해지려면 예술성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예술은 놀이이다. 모든 놀이가 예술이 될 수는 없지만 훌륭한 예술작품은 훌륭한 놀이 정신의 산물이다. 양식화가 잘 되어 있을수록 관객은 즐겁다. 뮤지컬의 오락성은 공들인 대본, 가사, 음악, 연출, 연기, 조명, 의상, 분장, 안무 등이 통일될 때 무궁무진하게 더해진다. 뮤지컬 작품이 언제나 어둡고, 무겁고, 사회를 고발해야 한다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솜씨 좋은 예술가들은 그 치밀함을 감춘다. 자신의 노력에 대해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고 재미있는 결과물 안에 그것을 감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