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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유 Mar 31. 2024

사랑받지 못할까봐 벌벌 떠는 어른아이였던 나

나의 자기학대 연대기(3) _ 사랑이 떠나는 순간

※ 이번 글은 정서적/성적 학대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하세요.


어른들의 시선을 신경 쓰던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시선을 신경 쓰던 청소년으로 자랐다. 끔찍한 일이었지만, 내 주변의 누구도 그것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 네 주변에 좋은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야.'하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런 자기 학대가 끔찍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줄 어른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어른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학대 사실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점이 내가 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건, 나를 아주 오랜 시간 옭아매고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내가 이 일을 스스로 털어놓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던 조금 이상한 일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게 어른이 된 내가 스스로에게 일삼았던, 그리고 일삼게 했던 극심한 자기 학대의 장대한 서막이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밝혀둬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확히는 검정고시를 쳤다. 이건 아직 성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10대가 어른들의 세상에 빠르게 진입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 이야기가 범죄에 준하는 행위가 속해있기도 하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이 사람들이 겉으로는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미리 말한다. 모든 봉사 단체의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내가 그 단체에, 계속 그 단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ㄱ단체라 하겠다, 처음 간 것은 17세의 어느 가을이었다. 그 당시에 ㄱ단체에서 유기견 관련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지인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막 고등학교를 자퇴한 상태였고, 정신과 진료를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개를 기르고 있었고, 그 사람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봉사에 나갔다. 오랜만에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제법 즐거웠다. 몸이 조금 힘들기는 했는데, 정말 못하겠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인의 지인들을 만나며 편한 시간을 보냈다. 그 단체는 매주 일요일에 봉사 활동을 진행했기 때문에 매주 일요일에 ㄱ단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내가 굉장히 봉사에 열정적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그 단체에서 빠르게 지위를 넓혀나갔다. 일처리를 빠르게 잘 했고, 오마이뉴스라는 사이트를 통해서 단체에서 하고 있는 활동을 취재해서 기사로 만들었다. 산책 봉사를 진행하는 봉사자들을 통솔할 수 있게 되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나는 어른들이 좋아할만한 말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좋아하는 말을 해주고, 할 일을 잘 하며, 약간 나대는 아이는 무언가를 시키기에 좋은 아이였다.


점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늘어났다. 그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좀 더 높은 이해도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고, ㄱ 단체와 관련이 있는 동물 병원에서 무급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8시까지 출근해서 저녁까지 일했다. 매일같이 회식이 이어졌다. 17살에 술을 시작했다. 이런저런 검사 시약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가도 우울증이 심해지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시작되었다. 주 1회 정신과를 가기 위해 출근하지 않았다. 


그 때였다. 동물병원의 원장이 2층의 으슥한 곳으로 불러 나란히 누우며 몸을 더듬기 시작한 것은. 테크니션 선생님이 작은 것 하나에도 짜증을 내며 과도한 지시를 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확실하게 청소년에게 이루어지는 학대였다. 내가 일하던 동물 병원과 ㄱ 단체는 쉽게 말하면 사람의 소중함을 모르는 곳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이유로 그 곳을 떠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떠날 수 없었다. 고등학교도 다니지 않는 나는 이곳을 떠나면 더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수의 테크니션 면허가 국가 공인 면허가 되기 전이어서, 잘 자리 잡으면 계속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나는 돈 이상으로 무언가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 돈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 곳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어그러졌다. 정상 궤도를 벗어났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사랑'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사람들이 저지르는 불법적인 일을 눈감아줬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테크니션 선생님과 가족인지에 대해 물을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다. 가끔 그녀의 집에서 잠을 잤다. 헤어질 때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을 껴안았고, 그들 대신 봉사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쓴 소리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면 할 수록 그 사람들의 '사랑'은 나를 떠나갔다. 그때쯤, A 지역 대학에 다니는 동물 병원 관련 학과 학생들이 단체에 대량 유입 되었었는데, 그 시기랑 그들이 나를 홀대하기 시작한 시기가 비슷했다. 나는 그때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아, 나를 버리려는 거구나. 나를 버리고, 어른이고 전공 지식이 있고, 단체에 좀 더 이득이 될만한 사람을 왕창 데리고 들어오려는 거야. 


좀 끔찍했다. 수의사 면허만 따오면 동물 병원을 물려줄 것이라고 했으면서. 나를 하대하면서도 나와 계속해서 입 맞추는 그런 행동이 끔찍했다. 단순히 끔찍하기만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 안에는 두 정신이 혼재 했다. 계속해서 사랑 받아야 한다는 강박과, 이게 어딘가 콕 집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으니 이제 그만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 


그 뒤로 그 곳에서 벗어나는데 한참이 걸렸다. 내가 대학을 온 것이 21살 봄의 일이고, 대입을 위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 그것보다 반년 정도 앞선 일이었으니까, 대략 20살쯤 이었을 것이다. 내가 약 3년간의 정서적/성적 학대에서 벗어난 날은 별일 없는 날이었다. 전화번호 바꾸고 잠수를 탔거든. 그 때 마지막 메세지를 보내는데 얼마나 벌벌벌벌 떨었는지, 휴대폰 가게 아저씨가 휴대폰을 뺏고 대신 메세지를 보낸 다음 번호를 바꿔줬을 정도였으니까. 


아직도 가끔 그곳의 꿈을 꾼다. 아직도 그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웃긴 일이다. 아직도 그들이 상냥한 사람의 탈을 쓰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전문가로서 이런저런 교육을 하는 것은.


나에게는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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