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기학대 연대기(1) _ 불행에 관하여
내가 왜 자기 학대와 자기 관리를 구분 지어 생각하기 시작했는지 이야기 해보자면, 순전히 자기 만족감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는 자기 관리는 과연 나를 위한 자기관리인지 의구심이 들었고, 삶의 중심을 나로 두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에 대한 판단은 과연 스스로를 위한 것 인지를 의심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의구심과 의심은 내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기관리를 했고, 삶의 중심을 나로 두지 않은 상태에서 살았기 때문에 드는 것이기도 했다. 이건 나의 기나긴 자기 학대에 대한 이야기.
유아기부터 이어진, 자기 학대에 대한 이야기다.
어째서 행복하기만 해도 모자른 유아기부터 자기 학대를 일삼았는지 이야기 하자면, 가정사 이야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다. 슬프게도. 잠깐만 우리 집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리 엄마는 나를 미혼모 시설에서 낳았다. 시골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의 가족들이 엄마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꿋꿋하게 미혼모 시설까지 가며 아이를 낳자, 친가의 가족들은 엄마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아빠는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잦은 가출을 시작했다. 나는 엄마와 친할머니와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은 아주 평범했던 날에, 아빠는 아주 사라졌다.
그래도 아홉 살 까지는 아빠가 종종 전화를 했기에, 나는 아빠의 존재를 아주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그 뒤로 집으로 전화하지 않았다. 엄마의 휴대폰으로 전화 오지 않았으며, 몇 년 전에 막내 큰 아빠가, 우리 아빠는 4형제 중 막내였기 때문에 나는 큰 아빠가 세 분이 계신다, 전화를 받았던 것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큰 아빠들을 둔 덕에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도 굶주리는 일은 없이 컸다. 첫째 큰 아빠는 막내가 그런 무책임한 일을 저지른 것은 본인들의 책임도 있다며 생활비를 보내줬다. 심지어 물가가 너무 올라 보내주는 생활비가 적다 싶으면 생활비를 올려주기도 했다! 엄마는 이런 큰 아빠를 둔 것은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감사해야 한다고.
내가 살던 고향 마을은 서울이긴 하지만 서울 외곽이라 경기도라는 느낌이 좀 더 강한 곳이었다. 아이들이 많아서 길 가는 사람의 절반이 누구 엄마거나 누구 할머니였다. 그렇게 길 가다 마주치는 동년배의 부모님들은 내게 성공해서 엄마를 호강 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호강이라는 단어의 뜻이 뭔지도 모를 때에, 나는 호강이라는 말을 배웠다. 내가 성공해서, 엄마는 고생을 그만하고, 나는 혼자서 알아서 잘 살기. 엄마의 짐이 되지 않기. 내가 배운 호강은 그런 것이었다.
어른들은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우리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음에도. 분명히 말하자면, 엄마는 한 번도 나를 포기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으며 나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벽한 형태의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불행한 사람들이 되어야 했다.
그 때부터인 것 같다. 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과도하게 신경쓰는 아이로 자란 것은. 엄마는 주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내가 손이 안가서 고생인지도 모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엄마는 아마도, 주변 사람들의 그런 말에 일종의 '먹금'을 했던 것 같은데 어렸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 내가 손이 안 가는 아이로 자라면 엄마는 이런 말을 안 들어도 되겠지?'
아마도, 그럴 거야.
나는 그렇게 굳게 믿었고, 씩씩한 아이로 크기 위해 노력했다. 뭐, 순전히 노력해서 된 건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 성격이 조금 드세고 소위 짱 먹는 타입의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동시에 정서적으로 아주 불안해서, 무언가를 잘 하는데 집착하는 아이기도 했다. 모두의 앞에서 무언가를 하면 뭐든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 엄마 혼자 기르는 아이라는 티가 안 나게 해주려고 온갖 애를 썼다.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우리는 같이 싸웠다. 세상의 편견,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 뭐 그런 것들과. 그때는 각개전투라고 느꼈지만.
사람들이 무언가를 물으면 명확하게 대답했다. 조금 맹랑하다는 소리도 가끔 들었었다. 어르신들의 예쁨을 받았다. 큰집에 가면 큰 아빠가 물으시는 질문에 똑똑하게 대답하려고 애썼다. 큰 아빠는 칭찬이 후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애써 대답하거나 무언가 수행의 결과를 내밀 때는 칭찬이 후한 사람이었다.
이게 맞다고 믿었다.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주변 어른들이 내가 모자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오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