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기 학대 연대기(2) _ 장래희망
※ 이번 글은 아동에 대한 정서적 학대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하세요.
어릴 때 꿈은 다들 꿔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에야 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장래희망이라는 단어도 사실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꿈이라는 단어의 모호함보다는 낫다고 생각 한다, 여전히 꿈이라는 단어가 갖고있는 그 몽글몽글함 만큼은 좋아한다. 나의 자기학대 연대기(1)이 어른들의 시선에 날 맞춰가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나의 자기학대 연대기(2)는 어른들의 시선에 맞추기를 넘어서 어른들의 시선이 나 자신을 결정했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도 꿈이 있었다. 한, 6살까지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꿈은 간호사다. 나는 어릴때도, 지금도 주삿바늘을 제법 무서워하는 편인데 특이하게도 내가 되고싶다고 말한 최초의 꿈은 간호사이다. 첫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내가 왜 간호사가 되고 싶어 했는가보다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면, 왜 한동안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는지다. 엄마에게 내가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의 어릴 때의 꿈이 간호사였다며 수줍게 웃으며 말해주던 그 얼굴을 기억해서였다.
엄마는 평범한 조금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4남매 중의 막내인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이차이가 제법 나는 형제들이 취직하기 전 까지는 제법 빡빡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런 엄마는 꿈이 있었지만, 꿈을 이룰 기반은 없었다. 여상을 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여상을 졸업한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하면서 보냈다. 엄마에게 꿈은 이미 너무 먼 것이었다. 작은 나의 분신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그 다음으로 내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의사였다. 엄마가 보여주는 추리 미국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초등학생은 NCIS에 나오는 더키같은 해부학자가 되고 싶었다. 생각해보자면 참, 용케도 의사가 되어야지 해부학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인터넷 같은 곳에서 찾아봤던 게 아닌가 싶다. 해부학이라는 직업에 푹 빠져 산 이후로는 딱 한 집단을 빼고는 해부학자가 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당연하게도 그 집단은 가족이었다. 정확히는, 나의 친가.
나는 큰아빠로부터 생활비를 받아 산다. 지금 받는 금액은 월 70만원 정도. 내가 어렸을 때에도 그 금액은 조금 작았을지언정 끊긴 적은 없었다. 나에게 큰아빠는 하나의 커다란 성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도 나는 내가 입고 먹는 것이 일정 부분 큰아빠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았던 나는 큰아빠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다. 큰아빠의 취향을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큰아빠는 지금 말로 이야기하자면 전형적인 나이든 사람이었으므로, 그에 맞는 말만 하면 되었다. 해부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보다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그가 기뻐할 것을 알았으므로 나는 그렇게 이야기 했다. 예상대로 큰아빠는 기뻐했다. 쩐주가 기뻐하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으로 내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외교관이었다. 이 자식 왜 이렇게 진로 희망이 멋대로야? 해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이것도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초까지 생각했던 꿈이니까. 영어 학원에서 영어를 빠르게 습득한다는 이유로 국제중학교 시험을 칠 것을 권유 받았던 나는 , 금전적인 문제로 인하여 치지는 않았다, 그 뒤로 한동안 언어에 빠져 살았다. 그 때 즈음부터 수학이 적성에 안 맞아서 의대는 무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뒤로는 한동안 영어에 빠져 살았다. 프랑스어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 해부학자 때처럼 친가의 사람들에게 꿈을 바꿔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제법 지위가 있고, 출세라고 할만한 직업이며, 누군가가 부러워할만한 직업. 큰아빠는 이번에도 내가 그런 직업을 선택했다는 것에 크게 만족했다.
내가 친가의 사람들에게, 정확히는 큰아빠에게, 공개한 마지막 꿈은 소설가였다. 중학교 때부터 신문부 활동을 했던 나는 글쓰기가 제법 재밌었고 언제나 도서관 책에 묻혀 살았으므로 책을 쓰는 일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다. 당연히 예고에도 관심을 가졌고, 문창과가 있는 예고 중 하나가 집에서 그나마, 예고 문창과는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기준 안양예고와 고양예고 뿐이었다, 가까워서 진학하고 싶었다. 중3이 되던 해에 큰아빠는 나에게 고등학교는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큰아빠가 물어본 저의는 인문계를 갈 것인지 실업계를 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 때 눈치없게도 예고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큰아빠는 그 말에 노발대발하며 이렇게 말했다.
" 네가 뭐가 부족해서 딴따라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
그 말을 끝으로 큰아빠는 나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셋째, 그러니까 막내 큰아빠가 애가 우니 그만하라고 말릴 때까지. 큰아빠는 한참 동안 비난을 이어나가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방에서 나갔다. 그 다음 추석에 내가 예고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의 유명한 여고에 진학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난 후에야 큰아빠는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는 그 여고의 교복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듣는 시늉은 했다. 그는, 나의, 쩐주였으니까.
나는 그 뒤로 두엇 정도의 꿈을 가졌지만, 큰아빠에게 그 꿈을 공유한 적은 없다. 인스타그램을 본 사촌 몇 정도가 그 꿈을 알고 있을 뿐.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그에게 나는 무엇이었을지. 내가 무엇이었길래 딴따라 학교에 가면 안되었던 것인지.
그는 내가 글로 벌어 먹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