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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Dec 27. 2020

여전히 난 나무가 부럽다

대학 1학년 때인가 보다. 처음 나무를 부러워하게 된 때가 그즈음이다. 부러움을 넘어 나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내 눈에는 나무야말로 주변과 잘 어울리며 즐겁게 살아가는 생명체로 보였다. 시기도 질투도 허영도 없는 생명처럼 보였다. 우리와는 달랐다. 그때는 오로지 효율적인 경쟁 기계로 살아가는 것만이 미덕이던 시절이었다. 뭐, 살아보니 지금도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허영심이 좀 더 세련되게 변한 것 말고는 말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갑작스러운 캠퍼스의 자유는 나에게 혼란과 무질서 그 자체였다. 세상도 혼란스러웠다. 온 국민의 두뇌 속을 세척하고 재갈을 물리던 시기였다. 구국의 화신이라던가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는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 밖 상황보다 개인적이고 작은 일들에 더 마음이 쓰였다. 이를 테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만능열쇠가 될 수는 없는지 따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만능은커녕 애초에 어떤 자물쇠에도 맞지 않는 열쇠였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열쇠라서 이곳저곳 만나는 사람들마다 억지로 끼워 맞춰보아야만 하는 것 말이다. 그럴 때마다 열쇠는 조금씩 깎이고 부서지고 무뎌져 갔다. 마치 닳고 달아 헐거워져야만 서로의 마음을 열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깎기고 다듬어지면서 점차 많은 사람의 자물쇠에 맞도록 무뎌져 가야 하는 열쇠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만능열쇠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을 때 나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아니 그런 것을 초월한 존재가 보였다. 기숙사로 가는 깔딱 고갯길 숲 나무들이 마치 신선들처럼 느껴졌다. 왜 신선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어떤 풍파에도 가볍게 움직이지 않고 관조하며 살아가는 듯한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그 나무들도 일 년 내내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을이 되면 모든 잎을 자신의 몸에서 떨어내는 아픔을 견디며 쌀쌀한 바람과 차디찬 이슬을 오롯이 맨몸으로 맞아야 한다. 겨울이 되면 죽음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성장은 꿈도 꿀 수 없고 오로지 버티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언 땅이 녹기 시작하는 봄이 되면 죽음 가까이에서 견뎌낸 그 고통만큼 삶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얼었던 외투를 벗겨내고 생살을 드러내야 한다. 제 몸에서 떨어내야 했던 잎을 다시 돋아 내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꽃을 피워내기 위해 여름 동안 또 얼마나 자라야 하는지 자신들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다시 가을과 겨울을 버텨낼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무는 그렇게 자연을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사시사철 멋들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나무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 나무들도 자연에 대한 원망과 증오 그리고 따뜻한 기후에 대한 사랑과 동경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때가 되면 누구나 알게 되는 것을 나도 알게 되었다.


집 근처 4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치열한 삶에서도 400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처음 나무를 부러워하던 시절로부터 이미 수십 년을 벗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난 나무가 부럽다. 400년의 고독이 부럽다. 그 시간 동안 수많은 애증과 고통과 번민을 겪어낸 그 의지가 부러운 것이다.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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