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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Dec 23. 2023

동일한 점심

편혜영 단편 소설의 단상

‘그’는 언제나 8시 38분 열차를 타고 복사실로 출근하여 복사를 하고 제본을 하고 제본책을 팔고 인문대 식당에서 정식 세트 A를 먹는다. 그리고 오전의 생활이 그대로 복사된 오후를 보낸다.


말하자면 조금씩 반찬이 달라질 뿐 본질적으로 같은 식단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식 A세트는 그의 일상과 꼭 닮은 식사였다. 규칙적인 기상 시간, 남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비슷한 차림의 복장, 같은 시각에 출발하는 출근 열차, 언제나 일정한 복사실의 영업시간이 그의 생활과 꼭 닮은 것처럼.


언제나처럼 구내식당에서 정식 A세트를 먹고 있던 그는 대각선으로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낯익기는 하지만 누군지 즉시 떠오르지 않았음에도 ‘실수를 하느니 예의를 차리’ 자는 심정으로 목례를 했다. 그는 식당을 빠져나가다 그 사내를 기억해 냈다. 매일 아침 8시 38분 열차를 기다리며 그와 1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서 신문을 활짝 펼쳐 읽던 사내였다.


그날 아침도 그랬다. 사내는 신문을 들고 있었고 그는 팔지 못하고 남은 제본 도서를 읽고 있었다. 행위 예술의 장면들을 편집하여 모아놓은 책이었다. 그리고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한 사내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열차로 시선을 돌렸고 그 사내는 열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사건 직후 그는 몰려든 사람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는 열차를 타지 못해 복사실 문을 정시에 열지 못할 것을 걱정할 뿐이었다. 그때 구내식당에서 만났던, 신문을 든 사내가 그가 앉아 있던 의자 끝에 앉았다. 그 사내는 “방금 본 기사인데요. 이 도시에서는 하루에 평균 274명이 태어나고 106명이 죽는다고 해요. 106명 중 하나가 바로 제 앞에서 죽은 건 처음이에요.”라고 말하더니 자신이 보던 신문을 떨어뜨렸다. 누군가 그 신문을 발로 찼고 그는 그렇게 자기 앞으로 굴러온 신문을 주워 들었다. 바로 그때 경찰이 다가와 그에게 참고인 진술을 요청을 하지만 그는 거짓말을 둘러대고는 도망치듯 현장에서 벗어났다.


처음으로 그는 8시 38분 열차를 탈 수 없었고 그래서 30분이나 늦게 복사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곧 동일한 일상이 시작될 뿐이었다. 간간히 복사를 하고 A4용지를 팔고 제본 요청을 받고 복사기를 손보고 제본 도서를 팔았다. 시장기가 없었으나 단지 정오가 되었으므로 정식 세트 A를 먹기 위해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그날 오후 여느 때처럼 복사실에서 영화(대사가 거의 없는 흑백영화)를 보며 졸던 그의 앞에 구내식당에서 만났던, 같은 출근 열차를 타는 사내가 불쑥 나타났다. 사내는 경찰에서 자꾸 연락이 온다며, 전화를 받지 않으면 경찰이 학교까지 찾아와 구설수에 오를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런 사내에게 그는 ‘경찰이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우리가 민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라고 얘기하고, 사내는 풀죽은 목소리로 ‘우리가 민 건 아니지요.’ 라며 그의 말을 따라한다.


사내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그는 퇴근 직전 걸려온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내에게서 들었던 ‘경찰서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대신 경찰서로 갔다. 그곳에서 CCTV를 통해 오늘 아침에 있었던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둥글게 모여 선 사람들 틈을 빠져나오는 그가 보였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며 서 있다가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시계를 들여다보고 뭘 타고 가야 할지 생각했으며 잠깐 생각을 정리하려고 구겨진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신문에는 숫자로 보는 하루 생활이라는 제목 아래 각종 통계가 실려 있었다. 그가 사는 도시에서는 하루에 평균 274명이 태어나고 106명이 죽는다고 했다. 106명 중 누군가가 자기 앞에서 죽은 것은 처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홀로 앉아 있는 그에게 경찰이 다가왔다. 그는 몇 마디인가 하고 불쑥 일어났고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CCTV 속에서 그는 자살 사건을 목격한 후 의자에 홀로 앉아 있었다. 늘 같은 열차를 기다리며 함께 출근하던 ‘신문을 든 사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그 사내가 얘기했다고 기억했던 것은 사실 자살한 사내가 떨어뜨린 신문을 주운 뒤 그가 직접 읽었던 기사의 내용이다.


자살한 사내가 매일 그와 함께 같은 열차를 기다리던, 구내식당에서 봤던 그 사내였다. 그런데 그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바로 ‘그’의 태도다. 그는 아침에 그 사내와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화면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사내가 해주었던 말을 자신이 기사를 통해 읽은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내’가 자살 직전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려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의 통증과 후들거림 같은 신체적 증상으로 전해오는 두려움’밖에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내는 그에게 직접 나타났다. 처음에는 자살 직후 그와 마치 ‘시소를 타는 것처럼’ 의자 양끝에 앉아 그에게 말한다. “이 도시에서는 하루에 평균 274명이 태어나고 106명이 죽는다고 해요. 106명 중 하나가 바로 제 앞에서 죽은 건 처음이에요.”


그리고 그날 오후 복사실에 사내가 또 한 번 나타나 ‘우리가 민 건 아니지요.’라며 풀죽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따라한다. 자살한 사내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경찰서에서 CCTV화면을 통해 알게 된 사실에서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사내가 선로 아래로 사라진 직후 사람들이 우왕좌왕 모여드는 틈에 그가 허리를 구부렸다가 펴는 게 보였다. 화면상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알았다. 사내가 뛰어내렸고 그는 그저 자기 발밑으로 굴러온 사내의 신문을 주웠다....”이때 구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경찰이 안타깝다는 듯 화면을 툭툭 쳤다. 이미 여러 차례 그 화면을 본 듯,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열차가 사내가 뛰어내린 자리를 통과했다.


사내가 뛰어내리고 열차가 오기까지 그 사이의 시간, 그 안타까운 시간 동안 그는 ‘그저 자기 발밑으로 굴러온 사내의 신문을 주웠’을 뿐이다. 그냥 버리면 될 신문을.


“저는 그 사람이 떨어뜨린 신문을 주웠습니다.” “신문이요?” 경찰이 CCTV를 끄며 말했다. 화면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그런 건 그냥 버리세요.”


그리고 하루에 106명이나 죽어가는 도시에서 그날 아침 열차로 뛰어든 한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민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고가 수습된 후 사람들은 열차를 타고 누군가 깔려 죽은 레일을 지나 직장으로 갔을 것이다. 사업상의 약속 장소나 사업체 면접 장소 같은 곳으로도.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토라진 사람에게 용서를 빌러 가는 길에도 레일을 지났을 것이다....누군가의 숨이 허망하게 끊어졌고 몸이 잘게 바스러져 한낱 얼룩으로 스몄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남은 빛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해진 궤도를 달리는 열차는 거대한 동일성의 명료한 상징이다. 열차로 뛰어들기 전 사내와 눈이 마주친 그가 이내 열차로 시선을 돌린 것은 동일성을 향한 무의식적 행동이다. 후들거리는 신체적 증상과 두려움 속에서도 습관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지각(동일성의 일그러짐)을 걱정한 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자살은 동일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인의 행동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단단한 동일성을 조금이나마 일그러뜨리려는 하나의 몸짓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몸짓은 육중한 동일성이 밟고 지나간 침목 위 검은 얼룩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얼룩으로.


결국 타인과의 완벽한 친밀감이란 동경에 불과하며 인간이란 타인과 최소한 2미터 이상의 거리를 가져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몰랐다...그 거리는 복사실을 찾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 놓인 카운터의 가로 길이와도 같았다. 누구도 카운터 너머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똑같은 두 레일이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궤도를 이루듯 우리도 서로 간섭하지 않는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언제나 같지만 서로 화합할 수는 없는 동일성을 각자의 머리 위에 이고서.


언제나 같다는 것. 그 때문에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언제나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거둬들였다.


언제나 같음을 갈망하게 된 우리는 한치의 빈틈도 없이 복사되는 삶에 짓눌리면서도 오히려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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