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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Oct 27. 2024

단편소설 - 시선(16)

숙자는 권 주임과 다른 두 명의 가신을 이끌고 해원에게 쳐들어갔다. 이미 판결은 내려졌다.  변명이나 변호의 기회는 없었다.


“이 살인자 년! 기생충 같은 년!”


숙자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거액의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편을 죽인 파렴치한 살인자였고, 뭇 사내들에게 몸뚱이를 붙이고 사는 기생충이었다. 

 

해원은 자신이 수익자로 된 보험이 두세 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보험 액수가 커서 해원도 처음에는 놀랐다. 그때는 흘려 들었지만 정수가 지인의 보험 실적에 도움이 되는 보험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해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얼이 빠져있던 해원은 숙자의 욕지거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상하지 못한 역겨운 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제야 기생충이라고 욕했던 진짜 이유를 알았다. 해원은 몸뚱이 함부로 굴리다 서울에서 쫓겨 내려온 년이었고, 뭇 사내들에게 가랑이 벌리다가 누구인지도 모를 씨를 품고 집안에 들어온 년이었다. 해원은 급히 수빈의 귀를 막아버렸다. 


그날 저녁, 해원은 늦게까지 어두운 거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비난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딸에 대한 모독은 참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유전자 검사였다. 검사 자체가 모욕적이지만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재가 되어 버린 정수였다. 그의 유전자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때 청소기의 먼지통이 어렴풋이 보였다. 남편을 보낸 지 일주일 남짓 지났다. 청소는 물론 먼지통을 비우는 일은 우선순위가 낮았다. 해원은 거실등을 켰다. 곧바로 먼지통을 열어 마룻바닥에 쏟아부었다. 짙은 갈색으로 염색한 해원이었다. 수빈의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도 정수의 것과는 확실히 구분됐다. 염색하지 않은 머리카락, 그중에서 가장 짧고 굵은 것을 골라냈다. 먼짓덩어리를 뒤지면서 해원은 정수를 떠나보낸 후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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