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는 남편의 상습적인 폭력을 오랫동안 견뎌왔다. 그러나 딸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남편을 신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린 해원을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언론은 알 권리와 공익성을 앞세워 지나간 사건들을 들춰내며 시청률을 끌어올리려 할 것이다. 해원은 평생 타인의 입 속에서 되새김질당하며 살아야 한다. 선주는 자신의 선택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실행했다.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과 학대는 인정되었지만 정당방위나 심신 미약은 인정되지 않았다. 22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선주는 딸이 당했던 추악한 비밀을 홀로 끌어안고 감옥으로 갔다. 수감 직전, 딸이 성년이 되면 남은 재산을 증여받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덕분에 만 18세가 된 해원은 위탁 가정에서 나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처음 발령받은 곳은 서울 변두리 지역 구청이었다. 이성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던 해원은 친절한 남자를 만날 때마다 백일몽에 빠지곤 했다. 갑자기 그와 사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가 하면 순식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안정된 삶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 해원이었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남성을 거부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녀에게 연애는 한 번쯤 즐기고 마는 놀이기구가 아니었다. 꿈꾸는 삶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였다.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조각난 기억을 다시 떠올릴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엄마와 헤어진 후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살아가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남성과 하나 되는 순간, 조각났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그녀를 덮쳤다. 관계를 가질 때마다 기억의 파편이 육체의 감각과 함께 그녀를 고통에 빠뜨렸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해원은 떠오르는 얼굴을 지우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남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해원의 과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원을 떠나지 않은 건 정수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