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삿짐이 내려간 휑뎅그렁한 공간을 해원은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끔 이 집이 어색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듯 어딘가 겉돌았다. 그때마다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던 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내 것이라고, 그 무리에 포함되어 있다고 인정받았지만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해원의 시선이 원형으로 패인 자국에 머물렀다. 대출금을 모두 갚던 날 정수와 함께 자축했던 테이블이 있던 자리다. 그때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눈썹을 실룩거렸다. 개구진 장난기가 묻어나는 눈썹이었다. 결혼 후 한동안 잊고 있었던 표정이었다. 해원은 무명 나무 아래의 기억을 떠올렸다. 눈 덮인 모악산 아래 눈부신 윤슬을 바라보며 그가 말없이 해원의 손을 잡았다. 해원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어두운 과거를 이야기한 직후였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 엄마에게조차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날 그가 말했다. 기억 속 과거란 현재 모습에 따라 해석되는 것뿐이라고. 현재에 집중하면 과거는 다시 기억될 수 있을 거라고. 과거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라는 그 말이 해원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고마웠다.
해원은 먹먹해진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텅 빈 거실 바닥을 향했다. 먼지덩이 앞에서 고통스럽게 가슴을 움켜쥐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딸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막막했던 날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엄마를 부르던 그날, 해원의 눈앞에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엄마가 나타났다. 해원은 소리치고 싶었다. 정말... 그걸... 몰랐어? 정말 몰라서... 말하지 않은 거야? 그러나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번개가 치듯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엄마는 사라지고 낯익은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대지에 가로 놓인 게이트를 열고 나와 춤을 추듯 사뿐히 걷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철문을 나오던 자신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해원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껴안으며 속삭였다. 묻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우린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해원이 텅 빈 거실에 놓인 에코백을 집어 들었다. 구겨진 서류 봉투를 꺼냈다. 천천히 절반으로 찢었다. 겹쳐 또 한 번 절반을 찢었다. 더 이상 찢을 수 없을 때까지 갈기갈기 찢었다. 해원은 딸과 함께 엄마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