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구리 시린 줄 모르고 굴러다니는
뿌연 공기에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르는 당신에게
"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소식 좀 업데이트 해줘. 애인은 없냐?"
"만나자마자 한 대 맞을래?"
"쯧, 딱한 자식."
"지도 솔로인 주제에!"
친구와 자조적인 웃음을 낄낄 내뱉었지만, 사실 나는 내게 애인이 없다는 것이 그리 아쉽지 않았습니다. 태생적으로 옆구리 시린 줄 모르고 도토리마냥 혼자 데굴데굴 잘 굴러다니거든요. 공연히 겸연쩍은 마음에 화제를 돌리려 했는데,
"그나저나 K는 요즘 어떻게 지낸대?"
"걔 요즘 연애하느라 바빠. 바쁘게 산다더니 썸은 또 언제 탔나 몰라."
아뿔싸. 또 사랑 타령입니다.
참, 오해는 마세요. 연애를 싫어하는 건 아니랍니다. 연애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 걸요. 솔로로 지내는 요즘, 예쁘게 사귀는 커플을 보면 흐뭇함과 동시에 스치듯 약간의 부러움을 느끼기도 해요. 딱 그뿐이긴 하지만요.
대학 입학 직후, 갑자기 주변에 불어닥치기 시작한 핑크빛 기류가 영 어색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톡에 쉴틈없이 쇄도하는 미팅 제안이 꽤나 당황스러웠달까요.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지요. 미팅에서 애인을 만들어봤자 한 달도 못 가 헤어진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다들 마음 한 켠에 있는 기대는 꺼뜨리지 못한 채 술자리에 나갔으니.
그런데, 언제부터 연애가 선망의 대상처럼 되어버린 걸까요? 모태솔로 기록을 축하하는 배너를 제작한 누군가의 장난이 SNS에서 화제가 됐을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이미 ASKY(안.생.겨.요.) 열풍이 한바탕 불어닥치긴 했었군요. 그러고보니 그보다 한참 전부터 '솔로부대'라든지 '커플지옥'같은 말들이 종종 눈에 띄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오래 전, 제가 태어나기조차 전부터 이미 발렌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 따위의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국민이 챙겨야 하는) 커플기념일이 존재했지요. 이쯤 되니 연애를 하는 것이 하나의 인생과제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연애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비합리적이라지만, 사적인 감정마저 분위기에 휩쓸려 결정해버릴 정도는 아니겠지요. 번식을 위한 본능이라는 가능성도 일단은 배제하겠습니다. 지금은 생물학 시간이 아니니까요. (그래요. 사실 나는 그저 로맨스의 로맨틱함을 믿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하루는 끊임없이 소개팅에 나가는 친구를 붙잡고 물어봤습니다.
"지치지도 않아? 소개팅을 잡는 거면 지금 당장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외로워서 이러는 거지, 뭐. 옆구리 시리다는 말이 괜히 나오겠냐?"
또 한 번은 여자친구를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한창 열애 중인 친구를 붙들어앉혔습니다.
"연애하더니 얼굴 확 폈네. 그렇게 좋냐?"
"목소리만 들어도 좋을 때지. 여친이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마지막으로, 2년 가까이 한 사람과 연애 중인 친구한테 물었습니다.
"지금도 애인이랑 데이트하는 게 처음 사귈 때처럼 좋아?"
"처음만큼 설레지는 않는데, 이미 남친의 존재가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헤어지면 그 허전함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
우습게도, 나는 이 세 명의 친구와 대화함으로써 친구나 더 사귀어야겠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마음이 외로울 때 불러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같이 즐겁게 놀러다닐 수 있는, 자연스럽게 내 일상으로 스며들어줄 수 있는 건 애인이나 친구나 마찬가지니까요. 결국 연인이라는 건, 나와 가장 화학적으로 잘 맞는 친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저와 다르게 사고한다는 건 알아요. 사귀기 시작하자마자 행동과 성격이 돌변했던 걸 보면, 저의 전 애인도 친구와 연인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스킨십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독점욕이 강한 것도 아닌 저는 에로스(Έρως)보다 필레오(φιλέω)**와 더 공명하는 것 같습니다. 연인으로서 보여주는 색다른 모습도 퍽 귀여웠지만, 친구였던 시절과 다른 뜨겁고 달콤한 분위기가 조성되어가는 와중에 불현듯 위화감을 느낀 적이 솔직히 적지 않았거든요.
**필레오 : 친구 간의 사랑, 애틋함
애인보다 친구가 좋다고 얘기할 때마다 어머니는 제가 아직 덜 자라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뭐, 정말 그런 건지도 모르지요. 사람은 사랑을 하면서 어른이 되어간다고들 말하니까요. 하지만 묻고 싶어요.
꼭 그런 사랑을 해야만 하는 건가요?
미안해요. 이번 편지는 두서도 결론도 없이 끝맺을 것 같네요. 몇 년을 고민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역시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첫 연애를 끝낸 이후로는 누군가의 고백을 거절할 때마다 하루종일 우울감에 젖곤 해요. 절친한 친구라 믿었던 사람이 고백해올 때, 저의 애정이 상대의 애정과 공명하지 않았다는 확인사살에 마음 한구석이 부스러져버리거든요. 어쩌면 영영 어른 되기는 틀렸는지도 몰라요.
여하튼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난 연애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혼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게 차라리 더 적성에 맞는 걸 어쩌겠어요.
당신은 연애 중인가요?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중인가요?
아마 난 답을 듣지 못하겠지만, 당신한테도 한 번 물어볼게요. 연애는 뭐가 좋은 건가요?
공기만큼 혼탁한 머릿속을 수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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