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향해 쏴라> TV로 본 평생 잊지 못할 영화
오래전부터 쓰고 있는 ‘필름킬러(filmkiller)'라는 아이디를 보면 사람들은 내게 묻곤 한다. '영화 많이 좋아하시나봐요?' 그렇다.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아주 많이. 영화에 대한 열정이 시작된 그때, '필름킬러'라는 아이디의 싹이 보이던 한 꼬마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필름킬러(filmkiller)의 영화사랑은 십 대 소녀시절 텔레비전 시청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도 그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만화 <은하철도 999>와 <들장미 소녀 캔디>에 열광하는 평범한 어린이였지만, 청개구리 기질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올빼미형 체질 탓인지 9시 뉴스 시작 전에 나오는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시다'라는 멘트만 들으면 오히려 눈이 더 말똥말똥해지곤 했었다. 특히 등교의 부담도 사라지는 주말이면 부모님 옆에 엉덩일 딱 붙이고 앉아 뉴스에 이어 은근슬쩍 '주말의 명화'까지 보는 일이 늘었다.
좀 보다 말겠지 싶어 그냥 내버려 두시던 부모님은 매번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까지 영화의 결말을 보고 자겠다는 초등학생을 처음엔 그만 자라고 좋게 타이르셨다. 하지만 눈치를 보기는커녕 점점 더 당당히 TV 시청의 권리를 주장하는 내게 급기야 '각종 명화 시청 금지령'(주말에 영화를 방송하는 '주말의 명화'(MBC), '토요명화'(KBS2), '명화극장'(KBS1) 이 세 프로그램의 시청을 금지하는 명령)이라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셨다. 혼자서 극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열 살짜리 꼬맹이에겐 그야말로 영화를 볼 수 있는 모든 경로가 차단되어 버린 셈이었다.
그때 그냥 포기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었더라면, 꿀잠을 자며 제시간에, 제대로 분비된 성장 호르몬의 양 덕분에 지금보다 키가 조금은 더 클 수 있었을까? 하지만, 모든 열정은 역경이 닥치면 더 불타오르는 법! 그렇다. 나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영화'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때마침 결혼 십 년 만에 단칸 셋방을 벗어나 내 집 마련에 성공하신 부모님 덕분에 비록 동생과 함께 쓰는 방이었지만, 막 내 방이 생긴 참이었다. 거기에다 새로 산 컬러 TV는 안방에 놓고 예전에 보던 흑백 TV는 우리 방에 있었으니, 이런 절호의 찬스를 어찌 활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느 토요일 밤, 갑자기 새나라의 어린이가 된 나는 일찍부터 이불 덮고 누워 안방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옆에 누운 동생까지 잠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드디어 적절한 때가 왔다 싶었을 때, 딴에는 용의주도하게 이불로 텔레비전을 덮어 빛이 새 나가는 걸 막은 뒤 텔레비전을 켰다. MBC '주말의 명화'에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가 방송되고 있었다. 음량을 아주 작게 해 놓은 TV에서 경쾌한 멜로디의 노래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흘러나오고,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있는 장면을 봤던 것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렇게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갑자기 누군가 이불을 확 젖혔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던 엄마가 방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오셨고, 완전범죄라고 믿고 있었던 혼자만의 비밀 영화 관람의 범죄현장을 들켜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때, 화면에서는 "옷 벗어"라는 남자 배우의 말에 막 옷을 벗고 있는 여자 배우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으니... 이런 '혼비백산'한 상황에서 어쩜 이리 '설상가상'한 일이 발생하는 것인지 그저 영화에 대한 나의 지나친 열정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때 엄마는 얼른 자라는 말만 하고 방으로 돌아가셨고, 난 이제 앞으로 영화보기는 힘들겠구나 싶었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토요일, 9시 뉴스가 끝날 때쯤이었다. 엄마는 날 불러 당신 옆에 앉히더니 "이제부터는 엄마랑 영화 같이 보자"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한참 동안 TV에서 하는 명화란 명화는 다 엄마와 함께 봤다. <왕과 나>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율 브리너는 빡빡머리라도 너무 멋있다고 공감했고, <백야> 속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훌륭한 춤사위에 감탄했으며, <러브 스토리>의 여주인공이 죽는 결말을 보며 슬퍼서 같이 엉엉 울었다.
어느새 이제 나도 엄마가 되어 버렸다. 열 살 난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볼 때면, 딸의 영화사랑에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주었던 그때의 엄마가 생각나 고맙고 또 고맙다.
붙임 : 훗날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왜 날 혼내지 않고 같이 영화 보자고 했었냐고. 왜 그렇게 멋졌냐고. 엄마 왈, "나도 영화 좋아하는데, 네 아빠는 9시 뉴스 보면서 조는 저녁잠 많은 사람이라 나도 같이 볼 사람이 있었음 했지." 고로 아빠도 영화킬러의 탄생에 한몫하셨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