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같이 밥 먹기 싫었다.

엄마 얼굴을 보기 싫었다.

by 정그믐

엄마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잠시 지냈다. 이 기간에 컨디션이 괜찮든 그렇지 않든 엄마가 고집했던 루틴이 있다. 바로 ‘식탁에서 밥 먹기’였다. 그런데 나는 엄마와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이제 미음조차 소화하지 못하는 위장으로 힘겹게 밥을 먹는 모습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엄마랑 얘기할 생각은 안 하고 그렇게 밥만 먹고 쌩쌩 가냐.”


엄마가 어느 날 가시 돋친 목소리로 저 말을 했다. 당신의 말이 맞았다. 사실 나는 엄마를 피해 밥을 욱여넣다시피 하고 방으로 도망치듯 갔다. 소화를 못해서 이제 죽만 먹어야 해. 아빠의 말이 이질적으로 들렸고, 실제로 엄마가 미음을 입안에 밀어 넣는 모습을 보고도 이질적이라 느꼈다. 엄마가 살고 싶어서 밥을 먹는 건지, 우리와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 식사 자리에 함께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후자라기에 엄마는 우리의 말에 짜증 섞인 대꾸 말고는 별 반응을 해주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억지로 자리에 앉아있는 거야?’란 반항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그래서 내 할당량을 다 먹으면 방으로 가 미친 듯이 다른 일을 찾았다. 휴대전화만 만지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원래 같으면 새벽 2시, 3시까지 잠들지 않았을 것을 밤 9시, 10시만 되면 일단 불을 끄고 누워버렸다. 언니는 엄마의 간호에 매달렸고 재택근무가 주된 아빠는 불어난 병원비 때문인지 여전히 엄마와 사이가 틀어져 있었던 건지 일하느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대화하는 가족은 언니밖에 없었다. 엄마는 집에 있는 동안 내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아니, 원망 섞인 말이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너도 장루 가는 법 알아서 언니 대신 네가 좀 할 생각을 해라.”


엄마는 옆구리와 배의 어느 부분에 인공항문(장루)을 달고 있었다. 그곳으로 변이라고 불러야 할지 배설물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애써 소화된 것들이 타고 나왔다. 그런데 암도 고치는 현대 의술이라면서 이 인공항문은 자주 샜다. 툭하면 새어 나와 옷을 갈아입히게 했고, 인공항문을 부착시키는 테이프는 접착력이 떨어져 여러 번 붙이고 갈아야 했다. 집에 있는 동안 이 모든 건 언니가 담당했다. 특히 장루를 새로 갈거나 엄마의 약을 챙기는 건 언니가 전담했다. 난 자신이 없었다. 언니가 엄마를 아이 다루듯 하나하나 챙기는 모습을 보고 더 자신이 없어졌다. 엄마는 내가 아기일 때 똥을 싸놓은 기저귀도 귀엽고 예뻤다고 했는데, 나는 엄마의 옆구리로 나오는 배설물을 볼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엄마가 내게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랐다. 왜? 엄마가 곧 죽는다는 걸 아는데, 그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언니는 엄마가 우리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아유, 엄마 그랬어요? 내가 해줄게요.’ 하면서 엄마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언니는 엄마 앞에서 울지 않았다. 나에게 엄마의 시한부 사실을 알리던 날에만 좀 울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날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마약성 진통제도 듣지 않아 고통 없이 데려가 달라고 흐느낀 날이면 나 역시 잠자리에 들지 못한 채 괴로워했다. 괴로움의 이유가 엄마의 말을 듣고도 곁에 가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저러다 엄마가 가장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세상을 떠나게 될까 봐 무서워서인지 알지 못했다.


엄마가 고통 때문에 짜증 섞인 말투로밖에 말할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너무나 최근 일이었다.


10여 년의 투병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지쳤다는 변명으로,

더는 엄마를 보고 싶지 않았다면,

나는 자식의 자격이 없는 파렴치한일까.

그래서 엄마는 떠나던 날 나를 부르지 않았던 걸까.


7화-이미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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