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한 친절은 오해를 낳는다
2장 관계 편
01
상대에 대한 지나친 배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성별이 다른 경우엔 이성적 관심이나 호감으로 잘못 읽힐 수 있고, 성별이 같은 경우엔 상대의 입장과 반응에 과하게 신경 쓰다가 일의 진척이 더뎌지거나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철학은 '배려'에도 통용된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은 법.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 딱 그만큼만 배려해야 평온한 관계가 유지된다.
고스트라이터가 되기 전, 제 역할은 늘 '갑'이 되고 싶은 '을'이었습니다. 일하면서 하도 '갑'에게 시달리다 보니 '나도 갑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나 할까요? 지금이야 '갑질 문화'에 대한 배격이 심해지고 SNS가 발달해 '갑'이라는 이유로 무례를 범하는 이들이 줄어들었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별의별 일이 다 있었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저 XX 나한테 성희롱한 거였네' 싶은 일도 경험했고요.
당시 저는 A 기업의 사보 편집기획 일을 하고 있었어요. 이번달 사보 마감을 하고 다음 달 사보 편집기획안 작업을 할 때였던 걸로 기억해요. 함께 일하던 디자이너와 A기업 사보 담당 2명(전부 남성이에요)이 회식 형태의 술자리를 하는데, 저도 참여하라는 연락이 왔답니다. 별로 가고 싶진 않았지만 계속 같이 일할 사이라 뒤늦게 합류했죠(이때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ㅠ.ㅠ).
갔더니 다들 멀쩡하게 술을 마시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2차를 가자면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자고 하더라고요. 문제는 인원이 4명이라 2명씩 택시를 나눠 타면서 발생했어요. 저랑 같이 탄 클라이언트가 알고 보니 술이 엄청 취했는데 그걸 몰랐던 거죠. 다른 택시를 탄 2명이 가는 동안 마음이 바뀌어서 집에 간다고 연락을 했길래, 그럼 나도 집에 가겠다 했더니 이 클라이언트가 저를 계속 붙잡는 거예요. 자기랑 술 한 잔 더 하자며, 기껏 왔는데 넌 술도 안 마시지 않았냐면서요. 그래서 마지못해 택시에서 내려 한 술집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지금 같으면 아무리 클라이언트라도 '미쳤니, 내가 너랑 술 마시게?'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15년쯤 전이라) '갑이 얘기하는데 무시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있었던 데다, '얘가 취한 것 같으니 잘 달래서 집에 보내야겠다(저보다 한두 살 어린 클라이언트였어요)'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또한 일종의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거죠. 제가 술 좋아하고 주사 심한 아버지 아래서 커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아버지 같은 주취자에 익숙하다 보니, 이럴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야 한다는 걸 몰랐던 거죠.
결국 저는 그날 술 취한 클라이언트의 개소리를 1시간 가까이 들어줘야 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돼 집에 없다, 지금 처가에 가 있는데 보고 싶다, 아내랑 잠자리를 한지 오래돼서 힘들다, 뭐 이런 개소리였는데, 앉아 있는 동안 '내가 왜 이런 소릴 들어야 하나?' 현타가 오더군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얘가 나한테 지금 수작 거는 건가?'라는 생각까진 못했어요.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 유부녀에게 설마,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네, 제가 바보죠. 사람은 원래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지라, 이런 미친 XX가 있으리라곤 생각 못한 거예요).
어찌어찌 잘 달래서(지금 시간이 많이 늦었고 난 곧 차편이 끊겨서 빨리 가야 된다고 계속 얘기해서) 들여보내고 집에 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제가 어떤 일을 당한 건지 실감이 나더라고요. '아, 나는 클라이언트에 대한 배려랍시고 술도 마셔주고 얘기도 들어준 건데, 얘는 내가 자기한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하고 수작을 건 거구나'라는 깨달음이 확 밀려온 거죠. '내가 반응이 더디고 판단이 늦되서 이런 일을 당하면서도 잘못된 일인 줄 몰랐구나'라는 자책과 수치심도 함께 들었고요.
결국 저는 다음날, 그 일을 저에게 맡겨준 편집기획사에 가서 이만저만한 일이 있어서 앞으로 이 일은 못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술자리에 저를 불렀던 디자이너 실장님은 저에게 백배사죄하면서 클라이언트에게도 사과를 요구했어요. 하지만 당사자는 저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택시를 타고 갔던 클라이언트가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데도 '미안하다'라고 사과를 하더군요.
그 이후로 저는 쓸데없는 배려는 하지 않게 됐습니다. 과한 친절은 배려가 아닌 호감으로 잘못 읽힐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친절과 경청과 배려도 적당한 선이어야 예의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특히 성별이 다른 경우엔 더더욱.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사실 성별이 같은 경우 배려가 독이 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다만, 서로 너무 배려해서 예의를 차리고 말을 조심하다 보면 일이 잘 진척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더라고요. '내가 이런 얘기해도 되나? 선 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입 다물고 있었는데, 상대도 같은 생각으로 하고 싶은 얘길 참고 있었다든지, '여기까진 내 일이지만 이건 네가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역할 분담을 명확하게 해 주면 쉽게 끝났을 일을, 미리 얘기하지 않아서 서로 미루다가 마감 시일이 촉박해져서 뒤늦게 고생을 한다든지 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몇 번 경험하다 보니, 좀 더 솔직하게 의견을 얘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도 좋지만 할 말은 해야 일이 제대로 진행되니까요.
배려와 경청은 참 좋은 말입니다. 배려와 경청이 기본 탑재된 사람을 만나면 기분 좋은 게 사실이고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정도를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뭐든 과해서 좋을 건 없어요. 일로 만난 친밀하지 않은 사이라면, '적당히' 배려하세요. 그래야 오해가 생길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