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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고 아늑한 작업실

-마치 수험생이 된 것처럼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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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사람은 누구나 어떤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 자리에 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 발전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 말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경우가 일반적이진 아닐 테니 제 맘 속에선 그냥 논외로 치려고 합니다. 뭐, 다들 아시겠지만, 세상 일이 그렇잖아요? 기껏 문장 하나가 어떻게 세상 모든 진리를 담아내겠습니까. 그저 이 문장이 의미하는 건 '자리'와 '사람'의 상관관계일 테니, 그 부분에 주목하면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왜 뜬금없이 '자리' 얘길 이렇게 길게 하느냐고요? 거기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최근 제 '자리'가 달라졌거든요. 이전까진 늘 원고 작업을 집 식탁에서 했는데, 식탁의 높이와 의자 높이가 제 체형과 맞지 않다 보니 손목과 어깨 통증이 심해졌어요. 이를 개선하기 위해 마우스를 버티컬 마우스로 바꾸고 손목을 안정적으로 지지해 줄 쿠션감 좋은 손목 받침대도 샀지만 크게 나아지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단지 내 커뮤니티 센터에 있는 독서실을 떠올렸습니다. 월말이 가까워지면 엘리베이터에 붙는 독서실 사용자 모집 게시판을 보고, '저길 활용해 보면 어떨까?'각한 거죠. '궁즉통(窮則通)'이라더니, 사람이 극한에 몰리면 뭐든 방법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난 5월 말, 큰맘 먹고 커뮤니티 센터 내 독서실을 탐방해 보았습니다. 옆 사람과 분리되어 있는 칸막이 책상과 그에 맞는 푹신한 의자, 책상 위를 밝혀주는 단계별 조명등, 휴대폰 충전이 가능한 개별 콘센트, 게다가 쾌적한 에어컨에 와이파이까지. '정말 최적의 공간인 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리가 다 차면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다길래 얼른 월 사용료 20,000원과 출입카드 사용료 3,300원을 납입하고 자리 하나를 분양(?) 받았습니다. 그리곤 6월부터 매일 꾸준히 이곳에 와 원고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 독서실의 장점은 한두 개가 아니지만 가장 큰 장점은 가성비라 할 만합니다. 일단 집과 가깝고(100~150m 정도의 거리입니다) 비용이 저렴합니다. 2만 원에 이렇게 쾌적한 작업공간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니까요. 두 번째는 집과 작업공간이 분리된 데서 발생하는 시너지입니다. 집에서 작업할 땐 조금만 원고가 안 풀려도 일단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웠는데, 여기선 그게 불가능하니 좀 더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달까요? 자연스럽게 작업 몰입도도 높아질 수밖에 없고요. 일례로 200자 원고지 15매 전후 분량의 인터뷰 원고 한 편을 쓰는 데 집에선 하루 반나절이 걸렸다면, 여기선 3~4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게다가 집에선 놀고 있을 때도 '아, 빨리 작업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하지만 이젠 출퇴근하는 직장인처럼 On/Off 모드가 가능해졌습니다. 일은 독서실에서만 하고, 집에선 휴식만 취하면 되는 거죠. 매일 노트북을 넣은 백팩을 메고 커피 한 잔 손에 들고 집과 독서실을 오가는 기분도 아주 상쾌합니다. 독서실에 다니니 다시 수험생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사실 제가 고3일 땐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독서실에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가 없었거든요. 그때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독서실에 가서 더 공부하는 친구들을 엄청 부러워했던 터라, 어린 시절의 한을 원 없이 푸는 기분입니다.



물론 잘 나가는 작가님들은 이미 번듯한 작업실이 있으실 거예요. 저 역시 미래에 대한 투자 개념으로 공유 오피스나 오피스텔 작업실을 마련할 수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오랫동안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한 건, '내가 그만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 때문이었어요. 프리랜서의 벌이란 게 늘 들쭉날쭉하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달까요? 그래선지 이번에 마련한(?) 제 작고 아늑한 작업실이 저에겐 큰 감동으로 다가오네요. 이런 좋은 생각을 떠올린 저 자신이 너무 기특하고 대견해지고요.


이 자리가 앞으로 절 어떤 사람으로 만들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작업 효율과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특효약인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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