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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P 아내와 ENTP 남편이 공존하는 법

-조금씩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들다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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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인스타그램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시간 잡아먹는 요물이더라고요. 인스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릴 때가 많습니다. 순식간에 알고리즘의 노예가 된 기분이랄까요? 가끔은 '이러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보고 듣고 생각하는, 지극히 편향적인 인간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하지만 애써 끊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진 않더라고요. 왜냐고요? 재미있으니까요.^^


오늘은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MBTI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MBTI가 인간관계의 화두가 된 건 한참 전부터지만, 사실 그동안은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혈액형 인간학과 비슷한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럴싸하지만 부정확한 데이터에 기반한 관계론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MBTI는 혈액형보다 훨씬 정확도가 높더라고요. 인간 유형 분류가 4개에서 16개로 4배나 늘어나서 그런가, '이거 정말 딱 맞네'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요즘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MBTI 관계론 콘텐츠를 열심히 읽는 중이랍니다. 그리고 그중 몇 가지 재미난 내용을 남편과의 관계에 접목시켜 봤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내용은 '조언을 무시하는 MBTI' 순위였는데, ENTP인 남편은 2위, INFP인 저는 16위였어요. 순위보다 설명이 기가 막힌데요, ENTP는 "조언 반박왕!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조언은 괜찮..."이라고 되어 있었고요, INFP는 "내 생각해 주는 조언에 감동받음 ㅜㅜ"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어찌나 남편의 성격과 딱 들어맞는지 신점 보는 무당인 줄 알았네요.


남편은 똑똑하고 말발 좋은 타입이거든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감이 충만해서 남의 조언에 흔들리는 법이 없어요. '나는 그냥 내 길을 간다' 스타일이랄까요? 그에 비하면 저는 남의 조언을 귀 기울여 듣고, 이를 자기반성 내지 자아성찰과 연결하는 타입입니다. 쉽게 감동하고 남의 말에 잘 휘둘리는 스타일이죠.


같은 과 4년 선배인 남편과는 5년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당시 전 화가 나면 감정이 앞서 눈물부터 흘리는 타입이었던 터라 어떤 경우에도 감정이 격해지지 않고 논리적으로 할 말 다하는 남편이 멋있어 보였어요. 만날 때마다 '넌 뭘 하고 싶어?'라고 다정하게 물어주고, 제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겁낼 때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잘 못해도 괜찮으니까 한 번 해 봐'라며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도 좋았답니다.




그런데 ENTP는 '연애하면 속 썩이는 순위'에서도 높은 순위더라고요. "말싸움 스킬 최상. 논리로 감정 눌러버릴 수 있음(4위)",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INFP는 "감정 기복 있지만 혼자 조용히 처리함(11위)"이라고 되어 있었죠. 신기했던 건 이 내용에 100% 공감하게 됐다는 거예요. 저도 연애 시절과 결혼 초창기에 이 문제로 엄청 속을 끓였거든요.


똑똑하고 논리적이고 말발 좋은 게 멋있어 보여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는데, 그게 '남'을 향하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하니 미치겠더라고요. 화가 나고 감정이 격해져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절 앞에 두고, 왜 자기가 이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내가 잘못한 건 뭔지, 얼마나 조목조목 따지는지 형사나 변호사가 따로 없었어요. 어찌나 얄밉던지... 게다가 전 그의 말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질 못하니 울화가 치밀어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죠. 남편과 다툴 때면, 매번 싸움에서 지는 패잔병이 된 기분이었어요. '누굴 원망하겠어? 내 발등 내가 찍었는데...'란 생각을 하면서도 속상하고 서운했죠.




하지만 '시간이 약'이란 말이 맞긴 맞더라고요. 한때 '이러다 이혼하는 거 아냐?' 할 정도로 격하게 싸우던 시기를 지나고 나니, '아, 저 사람은 이걸 싫어하는구나. 이 부분은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 하는 걸 기억하게 되고, 그다음부턴 서로 알아서 조심하고 피하게 됐어요. 조금씩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든 거죠. 물론 어떤 건 지금도 적응이 안 되는 게 있어요. 저는 불안+회피+방어기제가 강한 성격이라 말투에 민감한 편인데, 남편은 강하고 확정적인 말투를 구사해 저를 화나게 할 때가 많거든요. 얼마 전에도 농담이랍시고 기분 나쁜 말(나쁜 의도는 없다네요)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길래 제가 이런 말을 해주었답니다.


"난 말투에 민감하고 자긴 말투가 별로인데, 우린 어떻게 26년을 같이 살았을까?"


따지고 보면 세상에 신기한 일이 참 많은데, 우리 부부 같은 '환장의 조합'이 여태 함께 살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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