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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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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시집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라는 시집이에요.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졸업한 시인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고 합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2008년 4월 18일에 초판을 발행한 그의 첫 번째 시집인데요, 저처럼 제목에 끌려 구매한 독자들이 꽤나 많았나 봐요. 제가 산 판본이 2020년 10월 16일 발행한 초판 31쇄인 걸 보면요. 시집 중에선 베스트셀러인 듯합니다.




이 책은 제가 한창 책을 많이 구매할 때 샀던 시집이에요(한동안은 그냥 책장에 꽂혀 있기만 했지만요). 저는 시집을 좋아합니다. 시인들은 독특한 시각으로 섬세하고 예리한, 반짝반짝 빛나는 시구들을 속삭여주거든요. 가끔은 이상하고 또 가끔은 이해 불가인 내용들이 넘쳐나지만, 괜찮습니다. 시의 의미는 알면 좋고 몰라도 상관없어요.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묘한 분위기와 비범한 은유, 날 것 그대로의 언어가 한 덩어리가 되어 내 심장을 강타하는 그 느낌이 좋을 뿐이니까요.


이 책을 필사하기로 한 건 두 가지 목적에서였어요. 첫 번째는 언어의 빈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어휘력의 빈곤을 필사를 통해 극복해 보자는 거였고, 두 번째는 필사를 하면 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루진 못했어요. 어휘력이 확연히 늘어난 것도, 시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아, 이런 단어도 있었지', '이 단어와 이 단어를 매치하다니 신기하네', '이 단어는 처음 본다. 역시 시인은 다르구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됐고, 이를 통해 여러 가지 자극을 받게 됐습니다. 독서는 참 신기하게도, 읽을수록 쓰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고요. 필사의 매력도 알게 됐습니다. 필사를 할수록 필체가 좋아지고, 책의 내용을 천천히 음미하며 내 머릿속에 쟁여둘 수 있다는 걸요.


다음은 제가 필사한 표제시 <슬픔이 없는 십오 초>의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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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제가 이 시집에서 고른 멋진 문장들이에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 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식후에 이별하다 中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中


빵과 심장은 무엇이 닮았는가

오래될수록 까맣고 딱딱해진다는 점

-빵, 외투, 심장 中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존재가 비존재를 향해

무인 비행선이 하늘에서 지그재그로 추락하듯

느리게 굴러 떨어지고 있다

-전락 中


고독이란 자고로 오직 자신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기괴함이기에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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