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년 10월 16일 수요일, 87번째
스무 살 무렵부터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했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어려움은 느꼈지만, 딱히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면한 문제가 더 컸으니까요. 고등학교 때는 수능이 문제였고, 그보다 어린 중학교 시절은 자기 문제에 천착해있느라,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대학에 들어오면서 인간관계는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꾸만 사람들과 겉도는 것 같고, 좀처럼 가까워지기가 어렵더군요.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대인관계 집단 상담 프로그램도 지원해보고, 관련된 서적도 읽어봤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마다 어려움이 앞섰습니다.
연속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었던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왜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막연히 사람들과 친한 게 좋겠지, 내성적인 성격보다 외향적인 쪽이 나으니까라고 생각했을 뿐, 스스로 왜 변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군대를 가게 되었고 전역 후 유럽여행을 다녀오며 스스로 '나는 변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사람들을 대할 때 훨씬 자연스럽고 능숙해졌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변한 게 없었고, 주변 사람들과 갈등 끝에 갈라서기도 했고 새로운 인연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답게 행동하자, 그러면 사람을 대할 때 훨씬 편하게 대할 수 있을 테고, 상대방도 나를 편안하게 여기겠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겠지.'. 네, 저는 '나답게'라는 단어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편한 대로 한다는 게 나다운 것이라 여겼지요. 그러나 어렴풋이, 무언가 '아니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무려 스물여덟이 되어서였지요.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기에는 당시의 저는 계속된 시도와 실패에 지쳐있었습니다. 성과가 보이지도 않는 일에 더 노력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전역 후에 이리저리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하다 보니, 그만 에너지가 고갈되었던 거죠. 굳이 인간관계에서 무언가 더 하려고 하지 않고, 당면한 문제로 눈을 돌렸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해야 했고, 기왕이면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해서 시기도 적당했습니다. 그런데 덜컥 무기력증이 찾아왔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학업에서도 뭔가 더 하자니 그냥 다 싫었습니다.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발표랑 과제가 다 무슨 소용이냐. 다 놓아버리고 침대에 누워만 있고 싶었죠. 하지만 이대로 다 때려치우면 이 모든 일을 누가 책임을 져준단 말입니까. 병원을 찾아갔고, 그에 더해서 학교를 통해 상담도 받았습니다. 달라졌냐고요?
네, 어느 정도 달라지기는 했습니다. 그 덕에 학교는 무사히 다닐 수 있었고 졸업까지 했으니까요. 지속적인 상담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모 아니면 도인 데다가, 감정에 있어서 굉장히 극단적인 타입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때까지는 몰랐냐고요? 알고는 있었는데, 그냥 그뿐이었습니다.
약과 상담으로도 모든 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인간관계가 쉽지 않거든요. 아마 남은 한평생 고민해도 답을 얻기는 힘들 거라 예상해봅니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씩 나아지려고 노력할 뿐이죠. 그러다 어제 읽은 책이 의외의 답을 주었습니다. 레베카 뉴턴이 쓴 <존재감>의 한 구절입니다.
자기답다는 것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이 아닐, 자신의 의도에 충실하고 자기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나는 지금껏 '자기다움'을 오해하고 있었구나. 저는 인간관계에서 매력적인 인간이 되려면, 혹은 인간관계를 능숙하게 이어나가려면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고만 여겼습니다. 동시에 '나답게' 한다는 말 자체를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긴 뭔가 아니다 싶은 느낌이 올 때가 있었습니다. 나의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타인은 미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오해할 때가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답게' 행동하고 있지만, 그건 그다지 인간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적도 있고요. 보다 나은 방법은 '의도'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거였습니다.
그 결과로 설령 '나답지' 않더라도 말이죠. 중요한 것은 '나다움'을 고수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적절하게 나의 의도를 상대방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나무를 보면서도 동시에 숲을 본다고 하던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린가 싶지만, 아주 틀린 말 같지도 않더군요. 적절한 균형감각이라 해야할지. 통찰력이라 해야할지.
설령 방법을 알았다 해도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대하는 일에 있어서 절대 편해지는 순간도 오지 않을 거고요. 불편하고 괴롭지만, 잘 대처하는 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벌써 걱정부터 앞서네요. 그럼에도 발걸음을 옮겨봐야지요. 무섭더라도 한 발자국씩 꾸준히 말입니다.
정답이 없기에 더 어려워 보입니다. 차라리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된다고 규정이 정해져 있었더라면 마음고생이 덜했을까요? 아마 그렇지만도 않았겠지요. 무엇보다 인간관계라는 게 매뉴얼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데요. 대충 어떻게 하면 된다, 그런 건 있겠지만서도.
그래서 지치기 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내보려고 합니다. 너무 몰아세우면 또 제풀에 지쳐버릴테니, 딱 할 수 있는 그만큼만. 이럴 때는 또 '나답게'라는 말이 기존의 의미로 쓰여도 괜찮겠죠. 나답게-자기다움을 실천하며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