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언니에게
잘 지내나요? 마지막으로 마주한 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네요. 그래도 저는 종종 언니의 카카오톡에 올라오는 프로필 사진을 보며 언니의 요즘 일상을 짐작해봅니다. 언니 얼굴보다는 언니를 닮은 두 아이의 얼굴이 대부분이지만, 그 모습에서 언니의 흔적을 찾아보곤 해요. 언니도 그 아이들처럼 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나요? 언니라면 분명 부드럽고 단단한 엄마가 되었을 거라 믿어요. 나한테는 언니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참 이상해요. 생각해보면 내가 언니를 처음 만났을 그때, 언니도 참 어렸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을까요? 언니가 가진 특유의 단단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일찍 결혼을 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마냥 품어주던 언니의 따스함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 모든 덕분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이후로도 계속 우린 고작 4살 차이었는데, 언니는 진짜 어른 같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언니’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보다 조금 더 먼저 만난 세상을 들려주고 토닥여주는 사람. 가끔 투닥거리면서도 나를 향해 화살을 겨누는 누군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같이 욕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존재에게 대한 열망이랄까요. 그런데 슬프게도 저는 언니들과 가까워지지 못했어요. 낯선 사람 앞에서 굳어버리지만 윗사람들 앞에선 더욱 삐거덕거리는 제 탓이었죠. 유난히 선배들을 어려워했던 저는 그들에게 깍듯했지만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였을 거예요. 언니에게 끝내 말을 놓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한 줌의 서걱거림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건. 그래도 언니가 참 좋았어요. 어쩌면 너무 좋아서 더 조심스러웠을지도 몰라요.
가끔 생각해요. 언니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마냥 받기만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언니를 만났을 때 지갑을 제대로 열었던 적이 있긴 했던가요. 언니 앞에서 열어젖힌 건 내 마음과 눈물 버튼뿐이었던 것 같아요. 첫 직장을 그만 두고 준비한 시험에서 미끄러졌을 때도, 여기저기 수많은 직장 문을 두드리면서 자괴감과 모멸감 사이를 뒹굴 때도, 언제나 언니는 두 팔 벌려 나를 감싸줬어요. ‘그래도 나중엔 네가 제일 멋지게 살 거’라면서요. 그 말이 큰 위로가 되었어요.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진짜 그렇게 될 것만 같았거든요. 그 말을 붙잡고도 오랜 시간 방황하던 나를 아무런 평가 없이 그저 지지하고 응원했던 그 마음 덕에 불안한 발걸음을 하나씩 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언니에게서 무척 멀리 와 버린 걸까요? 딱히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서로의 삶에서 멀어져 버렸네요. ‘언제 한 번 보자’는 진심이 자꾸만 빈 말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뱉기 어려워져 버렸고, 근황 토크가 새로 낸 책이나 프로그램이 되어버려 꼭 강매하는 기분이라 삼키게 되고... 결국 아무 말도 건넬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언니라면 그냥 툭 내뱉은 인사에 언제든 해사하게 활짝 두 팔 벌릴 것 같다가도, 멀어진 사이를 채울 수 있을까 걱정되어 겨우 쥐어 든 인사말을 다시 넣어버리곤 합니다. 그럼에도 언니가 자주 생각나요. 어쩌면 이제 언니라고 부를 사람보다 저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훨씬 많아진 탓일지도 모르겠어요. 누군가 내게 ‘언니’라고 부르는 많은 순간, 난 언니가 생각나요.
함께 나눈 수많은 술잔과 캠핑장, 제주의 풍경, 언니가 해준 식사, 같이 들었던 촛불... 수많은 장면들이 떠오르지만 유독 자주 생각나는 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직장 근처까지 달려왔던 언니예요. 아이를 안고 있던 언니가 낯설기도 했고, 그 낯선 모습으로 먼 곳까지 와준 그 마음이 벅차게 고마워서요. 사실 그땐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마음에 걸려 있는지 모를 그 장면은 이상하게 꺼내볼수록 따뜻해져요. 그리고 가장 많이 생각나는 건 세례 받던 순간 내 뒤에서 눈물을 삼켰다던 언니의 말이에요. 그동안 내가 힘겹게 지나온 날들이 스치면서 꼭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고. 그래서 앞으로는 정말 좋은 일만 있을 것 같다던 그 말. 내 삶을 이렇게 애틋하게 바라봐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매서웠던 시절을 차갑지 않은 시선으로 어루만져준 언니가 있어서 그 암흑기를 잘 견뎠던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아주 어린 친구가 제게 그런 말을 했어요. 언니는 참 대단한 것 같다고. 진짜 어른인 것 같다고. 깜짝 놀랐어요. 난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서툰 거 투성인데. 그리고 언니를 떠올렸어요. 나한테 너무도 크게 보였던 언니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그런데 언니, 나는 언니한테 받은 그 커다란 마음을 먹고 조금은 단단해진 것 같아요. 쉬이 무르던 마음은 예전보다 좀 꿋꿋해졌고, 누군가 툭 치면 부러질만큼 뻣뻣했던 생각은 꽤 유연해졌어요. 그래서 이제 저도 누군가에게 희미한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도 같아요. 언니 덕에요.
보고 싶어요. 언니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나도 참 많이 주고 싶은데 여전히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미안함만 앞서고 그게 또 주저함으로 굳어버리지만 그래도 꼭 다시 보고 싶어요. 이번엔 내가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