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용기
"이런 얘기 털어놓을 수 있는 어른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오랜만에 만난 네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어. 하지만 그런 너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조금 복잡했단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많이 똑똑하지도, 지혜롭지도 않거든. 상처와 실수로 얼룩진 위태로움을 나이로 겨우 가리고 있는, 그런 겁쟁이일 뿐이니까. 그러면서도 네가 품고 있는 그 오해가 싫지만은 않았어. 그래서 결국 네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엉성한 미소만 지어 보이고 말았지. 그리고는 돌아서서 혼자 생각했어. 과연 무엇이 너를 오해하게 만들었을까?
아마 나는 너희들 앞에서 온갖 잡다한 지식들을 쏟아내며 많이 아는 척을 했을지 몰라. 학교에서 내게 부여된 역할 중 하나였으니까. 그건 다른 교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을 테지만 사회과에서는 지식만큼 '정의적' 요소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게 어줍지 않게 정의로움이나 비판적 사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을지도 몰라. 아마 그랬을 거야. 그런 모습이 네 뇌리에 조금 신선하게 박혔을 수도 있겠지. 무조건 수능만을 향해 달리는 고3 수업 시간에서도 '정의적' 요소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거든. '네 옆에 있는 친구들이 경쟁자가 아니다'라든가, '내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도 매우 필요한 일이지만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편에 서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라는 허상 같은 말, '나와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는 쉽고도 어려운 말을 던진 건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어. 네가 조금은 감명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내 말들이 계산된 연기라서, 나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거품 같은 말을 진짜인 양 내뱉은 것 같아서 조금 미안했어. 오해를 빚어 미안해.
돌이켜보면 교직 생활을 하면서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꽤 자주 했던 것 같아. 그건 나의 몇 안 되는 자부심 중 하나이기도 했어. 잘못을 인정하는 어른이고 싶었거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모습이 중요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싶었어. 하지만 어쩌면 나의 미안함은 한없이 가벼웠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저지른 잘못들이 사소해서 나를 수치심 구렁텅이로 빠뜨리지는 않을 정도의 부끄러움이었달까. 그런데 살다 보니 너무 부끄러운 일이 많더라. 혼자 고요히 책을 읽거나 일을 할 때, 길을 걷거나 밥을 먹을 때, 샤워를 하거나 이불속에 몸을 넣을 때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쪼그라들게 만드는 일들 말이야. 나를 향한 너의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그 수치심이 다시금 올라오고야 말았지 뭐야.
양성평등. 시작은 그 네 글자였어. 몇 년 전, 내가 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요즘 이런 말을 쓰지 않는다'라는 피드백을 주었거든. 순간 생각했어. 그럼 뭐라고 쓰지?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바로 '성 평등으로 고치는 게 좋겠다'라고 말했어. 순간 뜨끔하기보다는 의아했어.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미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나는 홀로 계속 생각했어. 왜? 뭐가 문제지? 생각해 보면 언젠가부터 양성평등이라는 단어를 자주 마주하지 않은 것 같긴 하더라고. 문제는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는 거야. 잠시의 고심을 더한 후에야 그 답을 깨달은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어. 그리고 너희들이 생각났지.
그보다 더 몇 년 전 나는 교실에서 너희들에게 '사회적 소수자' 관련 단원을 수업했고, 분명 젠더 이슈도 다뤘다. 나는 'sex'와 'gender'를 써 가며 열심히 설명을 했지. 수능 문제에 출제되지는 않지만 살면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들이라는 뻔한 말도 덧붙이면서 말이야. 당사자성이 높은 이슈에만 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인권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고, 그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도 강조했지. 그래서 더 부끄러웠어. 그때는 정말 진심이었거든. 그런데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순간 내가 내뱉었던 진심이 전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야말로 나와 관련이 깊은 '양성' 평등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지난날 내가 쏟아냈던 진심과 뱉어냈던 말들이 녹아내려 점점 끈적하게 들러붙는 기분이었어. 내게 수치로 끈끈하게 붙어버린 그것들이 지난 기억까지도 하나둘씩 소환하기 시작했어. 북마켓에서였어. 다른 작가의 부스에 찾아간 나는 용기를 내어 궁금한 점을 물었지.
"이건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저희는 아무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밝게 웃으며 답하는 목소리는 단호했어. 그만큼 나의 당혹 게이지도 올라갔지. 얼어붙은 내게 그는 말했어. 거기에 참여하는 모두는 개별적 특성을 가진 고유한 인물이기에 '아무나'가 아니라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어. 조금은 억울했지. 내가 말했던 '아무나'는 어떤 조건이나 제한 없이 참여할 수 있냐는 의미였으니까. 돌아서면서 생각했어. '아무나'가 아니라 '누구나'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언어에 그렇게 민감하다고 외치던 내가 타인에게 건네는 언어에 왜 좀 더 신중하지 못했을까. 시간을 되감고 싶었어.
기억은 더 거슬러 올라갔어. 책 출간 직전 내 글을 읽은 동료가 '편부모 가정'이라는 말을 고치는 게 어떻게냐는 말을 했거든. 그때의 나도 조금 의아했어. 그럼 무슨 말을 쓰지? 당황한 표정을 읽은 그가 '한부모'라는 단어를 쥐여준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어. 아니, 깊이 숙여버렸지. 나는, 내가 너무 부끄러웠어. 어딘가에 꼭꼭 숨어버리고 싶었어. 이불 속에 들어가 온 얼굴과 몸을 꽁꽁 숨겨봐도 견딜 수 없었어. 나로부터 나를 숨길 수는 없으니까. 며칠 밤 온몸으로 이불을 걷어찼다 뒤집어쓰기를 반복할 뿐.
부끄러운 날은 사라지지 않았어. 지난 부끄러움이 흐릿해질 무렵이면 꼭 새로운 부끄러움이 생겼거든. 그런 내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 나를 향한 맑은 네 눈동자를 보니 나는 더 부끄러웠어. 대학 내내 사람과 사회에 대해 공부했고, 지식뿐 아니라 '정의적'요소를 강조하는 과목의 교사였고, 언어를 다루며 사람에 대해 고민하는 일을 꿈꾸는 작가 지망생이란 사실이 나를 더 부끄럽게 했지. 누구보다 언어를 섬세하게 매만져야 하는 사람이, 글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다는 사람이 무지하고 무신경한 마음으로 단어를 집어 들다니. 내가, 참 부끄러웠어. 이 부끄러움을 네 앞에서 꽁꽁 숨긴 것만 같아서 또 부끄러웠어.
대체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들을 더 부끄러워할까. 아마 나는 아주 많은 날을 새로운 부끄러움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할 것만 같아.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음을 알기에 다만, 나는 바랄 뿐이야. 실수를 반복하는 부끄러움이 아니기를, 나의 부끄러움이 다른 누군가의 상처로 이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나의 부끄러움을 모르고 지나치지 않기를.
이미 아주 많은 부끄러움을 안고 있는 나는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나의 부끄러움을 마주한다면 당황하지 말고 꼭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 나는, 덜 부끄럽도록 무지와 아둔한 마음에서 열심히 헤엄쳐 나와볼게. 그리고 아주 작은 용기를 내어 말해볼게. 미안하다고.
미안해. 부끄러운 어른이라서. 부끄러운 세상 앞에 주춤하는 비겁한 어른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