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담아 Oct 08. 2024

서바이벌 사회와 서바이벌 프로그램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슬픔

작년 이 맘 때쯤 '청년 신진작가 출판 오디션'에 나간 적이 있어. 출판 오디션이라니. 워낙 오디션이 익숙한 시대라 알 듯하면서도 대체 출판을 가지고 어떻게 오디션을 치른다는 건지 잘 와닿지 않기도 했어. 오디션이라는 말은 원래 가수나 배우 같은 연예인을 뽑기 위한 실기 시험이라는 의미니까 말이야. 그래도 일단 지원을 했어. 작가 지망생인 내게 '출판'은 하나의 꿈인 셈이니까. 그래, 오디션이라는 건 지원자들에겐 설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해.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좀 이상한 건 그게 방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야. 그건 지원자뿐 아니라 그걸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매력 포인트가 있다는 말이잖아. 대체 그런 프로그램들은 왜 그렇게 많은 걸까?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은 '서바이벌'이라는 방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로 인해 두드러지는 특징 두 가지가 있어. 특정 분야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경쟁하도록 만드는 구도, 최후의 1인에게 돌아가는 어마어마한 혜택. '개천의 용'은 사라진 이 시대에 새로운 계층 이동 사다리가 주어지는 거지. 실제로 우리가 아는 몇몇 스타들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말이야. 사실 그런 스토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이기도 해. 일명 성장 스토리. 전혀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어떤 기회를 통해 명성과 부를 얻고 꿈을 실현하는 이야기 말이야. 


이때 중요한 게 바로 각 지원자들이 갖는 서사야. 그 이야기에 시청자가 얼마나 공감하고 몰입하느냐에 따라 개별 지원자의 인기와 프로그램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실제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고 가슴이 벅차거나 코끝이 찡한 경험을 하기도 하잖아. 그들의 성장과 성공을 응원하기도 하고 말이야. 실제로 청소년기에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고 꿈을 향해 달리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 덕에 K-pop에 입덕까지 했다고 하니 서바이벌 구도에서 지원자가 보여주는 치열한 열정과 노력이 매력적인 요소인 건 분명한 듯해.


그래서일까? 처음엔 그저 오디션에만 접목되었던 서바이벌이 다른 장르와 결합하면서 <강철부대>나 <피지컬:100>부터 <흑백요리사>까지 수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생겨나고 있어. 예능 프로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오징어 게임> 역시 비슷한 구조의 서바이벌 게임이 나오지. 꼭 나의 간절한 '꿈'이 아니더라도 그저 '살아남기'를 향해 달리는 거야. 물론 그 끝엔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고 말이야.  


언제나 트렌드에서 멀찍이 물러난 나이지만 유독 이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야. 일단 이름부터 서늘한 느낌이 들더라고. 서바이벌이라니. 대체 언제까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걸까? 저렇게 온 힘을 다해 애쓰는데 떨어져야 한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편치 않더라고. 조금 화도 났어. 인류는 발전하고 세상은 살기 좋아졌다는데 우리는 왜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하는 걸까? 살아남을 수 있긴 한 걸까? 무엇보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남은 최후의 1인이 모든 걸 독식하는 구조가 불편했어. 물론 TV로 방영되는 공개 오디션 특성상 꼭 1등이 아니더라도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프로그램 구조상 내가 살아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끌어내려야 하는 거잖아. 오싹했어. 그게 꼭 우리의 삶 같아서. 


그래, 그 '쇼'에서 펼쳐진 세트장이 우리의 현실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가진 달란트를 가지고 각자도생 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 말이야. 스스로를 구하느라 타인을 돌볼 새 없으며, 누군가의 넘어짐에 안도하기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것 같았어. 마치 내 옆 친구의 떨어진 점수에 안도하고야 마는 등급제 속 너희를,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꽤 슬프고, 조금 무서웠어.


누군가는 말해. 연대라는 건 참 이상적인 소리에 불과하다고. 인간은 결국 이기적인 동물이고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게 되어 있다고.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자기만을 생각하는 게 인간이란 동물이라고. 그들의 말을 전부 부정하는 건 아니야. 나 역시 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검은 마음을 바라볼 때마다 인간의 나약함과 악함에 서글퍼지곤 해. 하지만 그런 인간이기에 연대가 필요한 건 아닐까? 함께 협동하고 마음을 나누는 게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 아닐까? 너무 여리기에 서로에게 기대야 하고, 가끔 악한 누군가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손 잡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타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연대하고 타인의 손길과 도움을 받는 게 장기적으로 유리한 게 아닐까? 그게 완벽하지 않은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남는 방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 최후의 1인이 되어 혼자 엄청나게 큰 파이를 먹으면 되잖아,라는. 우리는 패자보단 승자의 스토리에 이입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언젠가는 집을 사게 될 나, 미래에 성공해서 고소득을 벌어들일 나는 있지만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할 나, 뜬금없이 참사 피해자가 될 나는 계획에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우리는 언제든 어떤 상황에 놓일 수 있고, 확률적으로 최후의 1인보다는 중간에 우수수 떨어지는 그룹에 속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고 말이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아이, 그런 아이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자신의 현재를 희생하는 부모, 약해진 팔, 다리로 다 큰 자식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노년, 그들의 보살핌을 먹고 자랐지만 정작 자신이 진짜 삶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청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해. 지칠 시간도 없이 열심히 사는 우리는, 왜 모두 행복하지 않을까? 


저마다 이런 극한의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우린 타인은커녕 스스로도 돌보지 못할 거야. 하지만 연대라는 가치에 동의를 하든 안 하든 객관적 조건이 너그러운 상황이라면 자연스레 타인에게 눈을 돌리지 않을까? 나만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야.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에너지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누는 마음으로 바꾼다면 삶이 좀 덜 팍팍해지지 않을까? 잠시 내가 넘어지고 한 눈을 팔아도 누군가가 나를 짓밟기는커녕 손을 내밀어 준다는 믿음만 있다면 실패해도 괜찮을 테니 말이야. 그러면 함께 달리는 일이 상대를 죽이고 나를 말라가게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의 성장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극소수를 위한 혜택보다는 우리 모두를 위한 삶의 조건이 충족되길 바라는 오늘이야. 

이전 02화 마음의 언어가 필요한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