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인연

바르셀로나의 인연1

by 정담아

여행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람이다. ‘어디’를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여행의 분위기, 만족도, 기억을 훨씬 더 좌우하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 가는 여행이 많았고, 엄청난 낯가림 탓에 여행지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는 것 역시 매우 드문 일이지만 이번 여행은 조금 달랐다. 애초에 함께 떠난 친구가 있었고, 낯선 이에 대한 호기심과 친절이 만렙인 친구 덕에 새로운 인연과 끈이 닿을 수 있었으니까.


처음 만난 인연은 게스트하우스 스탭 P였다. 그와의 인연은 게으름과 무계획, 우연이 빚어낸 결과였다. 우리의 허술한 여행 계획에서 숙소는 첫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의 이틀 치가 전부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한 도시에서 더 머물고 싶을 수도 있으니 미리 예약을 하지 말자고 했지만 실은 조금 귀찮았다. 빠듯한 서울에서의 일상 속에서 아직 닥치지도 않은 스페인 도시에서의 날들을 계획한다는 게. 그리고 결국 우린 예상보다 바르셀로나에 더 있기로 했다. 묵고 있던 호텔 카운터에 문의를 해보았다. 날아온 대답은 ‘가능한 방은 하나, 스위트룸뿐이고 하루에 130유로’라는 것이었다. 두말 않고 짐을 싸며 빠르게 근처 숙소를 찾아 이동했다. 바로 그 게스트하우스에서 P와 만났다.


그와 가까워진 계기는 저녁 식사였다. 숙소에서 머무는 첫날 저녁을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 모드로 지내보기로 했다. 근처 제과점과 마트에 들러 빵과 하몽, 와인, 치즈, 과일 따위를 샀다. 식당에서의 식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해지는 식비 덕에 잔뜩 집어 들었다. 문제는 식기가 없다는 것. 나머지는 대충 펼쳐놓고 먹는다 해도 와인은 차마 병째 들고 마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프너도 없었다. 마침 근무 중인 P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친구가 나보다 사회성이 훨씬 높았지만 영어 울렁증도 훨씬 심했기에, 내가 나서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평소에 잘 튀어나오지 않는 아주 선한 자아를 끄집어내서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잔이랑 접시, 포크 같은 걸 좀 빌릴 수 있을까요...?”


P는 흔쾌히 접시와 잔, 오프너, 포크 따위를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와인 한 잔씩을 서비스로 내어주었다.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터져 나왔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였을까. 평소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풍부한 비언어적인 표현이 쏟아져 나왔다. 한껏 오른 흥분을 흩뿌리며 사 온 음식들을 펼치기 직전, 우리는 잠시 고민했다.


이 음식을 조금 나눠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근무 중인데? 술은 빼자.

와인인데?

야, 와인도 술이야.

한 잔도?

그래도 근무 중이니까.

오케이. 근데 근무 중에 음식은 먹어도 될까?

스낵 수준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좀 그런가?

에이, 몰라 끝나고 먹겠지.

그래, 그냥 주자.


이번에도 내가 나섰다. 늘 행동이 마음을 따르지 못해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내가, 친구에게 떠밀려, 엉겁결에. 접시와 와인을 든 손에 망설임이 매달렸다. 친구가 내 발 끝에 들러붙은 주저를 떼어내고 내 등을 떠밀었다. P는 조금 놀라고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밝게 웃었다. 고맙다고, 나중에 먹겠다고 했다. 우리도 웃었다. 그 미소를 계기로 우리는 조금 가까워졌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본업은 디자인 쪽이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 스탭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말에 우리 사이의 거리가 급속히 줄었다. 친구 역시 미술 작업을 하고 있었고, 나는 글을 쓰고자 했으니까. 그러면서 둘 다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딱 봐도 생김새가 우리와 비슷한 아시안이었으며, 그의 여자 친구는 한국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오고 가며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그 인사는 그날 이전보다 농도 짙은 마음이었고, 조금 긴 안녕이었다. 인사를 시작으로 우리 사이에 놓인 작은 조약돌들을 하나씩 주워가며, 각자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참으로 반갑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확신 없던 작은 마음을 던지길 참 잘했다고. 닿지 못해 그 앞에 떨어질지언정 내게 남겨두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걸, 낯선 도시에서 또 한 번 배웠다.

keyword
이전 12화인생 파에야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