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파에야를 찾아서

스페인 파에야 탐방기

by 정담아


파에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대부분 일대일로 만나는 나로서는 최소 2인용으로만 판매하는 파에야를 주문하기도 힘들었다. 파에야를 시키면 다른 음식을 맛볼 기회가 사라지는 셈이니까. 게다가 진귀한 식재료나 놀라울만한 조리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비싸기까지 한 파에야는 내게 그야말로 형편없는 가성비의 대명사였다. 그럼에도 스페인에서 파에야를 꼭 먹자 다짐한 건 ‘반드시 제대로 된 파에야를 먹어봐야 한다’는 친구의 말 때문이었다. 여행 전 스페인에서 진짜 파에야를 만나겠다 굳게 다짐했다.


타파스에 익숙해진 터라 스페인에서도 파에야의 가격은 상당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제대로 된 곳에서 먹고 싶었다. 지불한 돈이 아깝지 않도록. 고심 끝에 찾아간 첫 번째 식당은 평도 좋았고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조금 구석진 곳에 있어서 접근성은 떨어졌지만 그래서 한적하고 평화로운 공기 속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예약을 하지 않았던 우리는 그곳에서 식사를 할 수 없었다는 것. 허탈함은 둘째치고 피로감이 몰려왔다. 파에야 하나만을 꿈꾸며 오르막과 내리막을 넘나들며 여기까지 왔는데, 기대감이 사라진 자리에 허기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다음 찾아간 곳은 시내에 자리 잡은 식당이었다. 사람이 많아 북적거렸지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고민 없이 파에야를 주문했지만 조금씩 후회가 밀려왔다. 긴 조리 시간 탓에 이미 턱 끝까지 차오른 허기를 주체하기 힘들어졌다. 자꾸 터져 나오는 배고픔을 와인으로 달래기를 수차례 반복한 뒤에야 근사한 파에야가 눈앞에 나타났다. 얼핏 보면 바짝 졸아붙은 떡볶이 국물에 밥을 볶고 그 위에 새우와 홍합, 레몬으로 장식한 것만 같았다. 한 입 떠서 먹었다. 온몸을 가득 채운 시장기 탓도 컸지만, 맛있었다. 퍼지지 않고 단단한 밥알 하나하나에 소스가 깊이 배어났다. 씹을수록 토마토소스의 다채로운 맛과 그 사이사이에 배인 바다내음이 풍겼다. 팬에 들러붙은 밥알까지 긁어내며 생각했다. 진짜 파에야를 만난 것 같다고. 진짜 파에야를 만나기 전의 생각이었다.


최고의 파에야를 만난 건 쿠킹 클래스에서였다. 강사의 지시에 따라 코팅되지 않은 팬을 달궜다. 그가 말하는 타이밍에 닭 날개, 손질한 채소들과 오징어를 넣었다. 들러붙지 않게 열심히 뒤적였다. 살짝 위험할 때는 올리브 오일의 힘을 빌려 팬과 재료들 사이를 유지했다. 코팅 한 겹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열기는 음식 맛을 더욱 섬세하게 좌우하기에 열심히 팬 위의 재료들을 뒤져 거렸다. 팬 위의 것들이 열기를 입어 새로운 색으로 변했을 때쯤 간 토마토를 부었다. 바닥에서 지글지글 거리는 팬을 보며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힘은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고 직접 닿는 온도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닿을 때쯤 토마토의 수분이 다른 재료들 속으로 사라졌다. 쌀을 넣고 몇 분 가열한 뒤 육수를 넉넉히 부었다. 또다시 시간의 힘을 빌렸다. 샹그리아를 홀짝이며 빨간 물에 잠겨버린 팬을 바라보았다. 점점 줄어드는 수면과 그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를 보면서 다시금 시간과 열기의 힘을 느꼈다. 쌀이 육수를 꽤 흡수했을 때쯤 새우와 홍합으로 장식했다. 새우의 색이 변하고, 홍합이 열릴 때까지 또다시 기다림은 이어졌다.


파에야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동안 냄비가 풍기는 맛을 안주 삼아 샹그리아를 홀짝였다. 시간을 덧입고 드디어 완성된 파에야. 그제야 왜 파에야가 그냥 볶음밥이 아니며, 왜 그리 비싼 가격에 판매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내 멋대로 판단해버린 수많은 존재 중 하나가 누명을 벗은 순간이었다. 구수한 닭 육수가 묵직하게 잡은 베이스에 오징어와 홍합, 새우 따위의 해산물이 산뜻하고도 깊은 중저음의 맛을 얹고, 새콤달콤한 토마토소스가 상큼하고 고운 음역대를 장식했다. 세 가지 맛이 빚어내는 맛의 화음이 일품이었다. 시간이 빚어낸 깊은 조화로움이 위장을 지나 마음에 닿았다.


프라도 미술관을 도느라 쿠킹 클래스를 패스한 친구를 위해 파에야를 포장해갔다. 볼품없는 그릇에 담긴 식은 파에야 한 숟가락을 먹은 친구는 말했다.

"와, 대박. 이거 진짜 맛있다! 인생 파에야야!"

그날 우린 그저 볶음밥이 아닌 진짜 파에야를 만났다. 그리고 뒤늦게 좋아하게 되었다. 시간의 힘으로 완성되는 파에야를, 그 깊고 다채로운 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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