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의 인연 2
새로운 사람보다 오래된 사람을 좋아한다. 오랜 관계가 주는 편안함과 든든함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새로운 사람이 선물하는 즐거움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건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된다는 거니까. 이번에 내게 새로운 세계를 안내해준 이는 J였다.
J는 우리가 신청한 와이너리 투어의 가이드였다. 그날 반나절 투어를 신청한 사람은 나와 친구 단 둘 뿐이었다. 덕분에 우린 J로부터 아주 상세하고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J는 역사, 지리, 정치, 종교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우리가 지나가는 장소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지만 사실 내가 재미를 느꼈던 이야기는 좀 더 사사로운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한국 잡채를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이나 자신을 카탈루냐 출신이라고 소개하는, 그의 정체성 같은 것들 말이다.
J는 카탈루냐 주에 속하는 바르셀로나 근교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와이너리에 도착하기 전에 들렀던 몬세라트의 작은 시장에서 만났던 농부들과 반갑게 인사했던 것은 그가 그곳을 자주 들르는 가이드라서가 아니라 고향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열심히 시식을 한 뒤 결국 한 덩이 사고야 말았던 그 치즈는 J의 고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6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 마을에서 할 일을 찾기 어려웠던 그는 바르셀로나로 일자리를 구하러 왔고, 비싼 집값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너무도 익숙한 서사였다. 저 먼 곳에서 나와 내 친구들이 겪고 겪었을 법한 이야기. 그래서였을까, 짧은 영어에도 맞장구치고 공감하며 우린 제법 가까워졌다.
그는 여행을 좋아하고, 등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이 다녀왔던 여행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그는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신기했다. 여행하는 그의 행복한 얼굴이 지금 우리 옆에 있는 그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사진 속 얼굴과 비슷한 표정으로 그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검은 마리아상 앞에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사실 자신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며 씩 웃어 보였다. 신을 믿지 않는 그는 우리를 사람들의 염원이 꽂힌 바위 앞에 데려갔고, 소원을 쓰라며 자신의 수첩 한 장을 찢어주었다. 소원을 쓴 종이를 넣으며 나는 말했다. 사실 나도 신보다는 인간에 더 관심이 많다고. 그리고 슬쩍 카탈루냐 분리 독립 투표에 대해 물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쪽을 택했는지를 알려주었고, 그 이유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그가 들려주는 모든 조각 하나하나가 흥미로웠고, 그것들이 얽히고설켜 빚어낸 J라는 존재가 새로웠다.
“나무에서 갓 딴 올리브 먹어본 적 있어?”
와이너리에 도착했을 때 부쩍 가까워진 그가 불쑥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갓 딴 올리브는커녕 올리브 나무조차 실제로 보지 못한 우리에겐 정말이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눈앞에 있던 올리브 나무에서 까만 올리브를 하나 따서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뜬 마음으로 입에 가져갔다. 악! 소리와 함께 입에 넣었던 과육을 땅으로 뱉어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J는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을 꺼내 보였다. 늘 절인 올리브만 먹었던 그는 아버지가 내미는 올리브 열매를 덥석 받아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혀 끝에 닿던 그 떫음을, 자신을 향해 껄껄껄 웃던 아버지의 웃음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그 강렬한 기억을 선물했다.
그가 선물한 건 강렬한 맛뿐만이 아니었다. 그 짙은 기억 뒤엔 그를 통해 조금 더 내밀하게 들여다본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이 있었으니까. 와이너리 보다 더 큰 세상을 안내해 준 J는 훌륭한 가이드였다. 인스타그램에 자신을 ‘Barcelona, Tour guide, Nature lover, Tireless traveler, Cat dad’라고 설명했던 그는, 멋진 친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