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의 단골가게

내가 품은 로망

by 정담아

누구나 자기만의 로망 하나쯤 품고 산다. 내가 간직한 로망 중엔 낯선 곳에서 여행생활자로 머물며 단골 가게의 주인과 친구가 되는 장면이 있었다. 사소해 보이는 이 로망은 쉬이 이뤄지지 않았다. 생활자일 땐 돈을 아끼기 위해 외식보단 직접 만들어 먹었고, 여행자일 땐 짧은 기간에 쫓겨 여러 곳을 둘러보기에 바빴으니까.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오랫동안 품었던 그 작은 로망을 실현시켜보기로 했다. 일단 단골의 개념부터 재정의 했다. 두 번 이상 방문한 곳에서 주인과 안면을 트고 자연스럽게 긴 대화를 나눈다면 단골로 인정! 꿈을 실현할 순간이 바짝 다가왔다.


스페인은 여러 모로 단골을 만들기에 아주 적합했다. 식당에서 주로 주문했던 타파스는 양이 적기 때문에 한 곳에서도 다양한 메뉴를 맛보게 되었고, 덕분에 여러 번 들러도 지루하지 않았다. 게다가 바(Bar) 자리가 많아 대화할 기회가 많이 열려있고, 사람들마저 친절하니 친구가 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먼저 단골로 지정할 식당을 고르기 위해 탐색전부터 돌입했다. 매 끼니때마다 두 군데의 식당을 돌며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선택했다. 다음 단계는 대화! 테이블이 만석이라 어쩌다 보니 앉게 된 바(Bar) 자리는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 주고받는 눈인사를 시작으로 손짓과 온갖 표정을 동원한 대화가 이어졌다.


다음날은 아예 일찌감치 식당으로 향한 우리는 텅 빈 테이블을 지나 굳이 바 자리로 갔다. 서서 먹어야 하는 불편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직원 부를 용기를 낼 필요도 없고, 잘 나가는 메뉴를 체크할 수도 있으며, 주문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손짓을 이용해 아무 음식이나 가리키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는 걸 몸소 체험했으니까. 무엇보다 전날 친구가 되었던 그와 다시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요리와 서빙을 오가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시선을 움직여 봤지만 우리의 친구는 없었다. 고민 끝에 물었다. 왜 그 친구는 없느냐고.


“걔는 월, 수, 금 근무야.”

아... 아쉬웠다. 더 이상 그 식당은 우리에게 새로운 음식을 맛보기 위한 곳도, 입에 맞는 음식을 또 맛보기 위한 곳도 아니었다. 새로 사귄 친구를 만나기 위한 장소였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관계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공간이었다. 커다란 아쉬움은 그 친구의 빈자리를 알려준 새로운 친구가 달래주었다. 그를 통해 새로운 음식을 알게 되었고, 셰리 와인의 세계로 초대되었다. 낯선 것들이 점차 익숙해지는 그 과정이 좋았다. 까끌거리던 것들이 푸근해져 가는 느낌이 좋았다.


문득 어린 시절 동네에 있던 책 대여점이 떠올랐다. 집 열쇠를 가지고 다니던 시절, 깜빡하고 열쇠를 챙겨 오지 않아 집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곳에 갔다. 주인아주머니는 또 왔니, 하는 표정으로 무심한 친절이 묻은 눈인사를 건넸다. 그 시선에 마음 놓고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한 권을 뽑아 들고 구석에 앉아 책을 읽었다. 엄마가 집에 올 때까지. 퇴근하고 집에 온 엄마는 잠겨 있는 문을 보면 으레 그곳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우리에게 그 장소는 책을 빌리는 가게 이상이었다. 내겐 언제든 불쑥 찾아가 안길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었고, 엄마에겐 어린 딸을 마음 놓고 맡겨둘 수 있는 암묵적인 이웃이었다. 우리의 사랑방에서 나는 주인아주머니가 추천해주는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하고, 그녀가 건네는 말을 먹고 한 뼘씩 더 자라기도 했다. 교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면서 방과 후 학원에 가느라 더 이상 그곳에 들를 시간이 없어지고, 패스트푸드점이나 분식집에서 친구들과 떠드느라 그곳에 들를 틈이 사라질 때쯤, 골목에서 그 가게는 자취를 감췄다. 발길이 뜸해진 건 나였지만 말도 없이 사라진 그 공간에 못내 서러웠다. 그리고 여전히 그 가게가 그립다.


물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공간에 익명으로 숨고 싶을 때도 많다. 하지만 여전히 자본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가게가 그립다. 짧게 수명을 다하고 사라져 버리는 가게 말고 오랫동안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가게를, 그런 생태계를 만나고 싶다. 사라져 버린 자리를 보면서 올라오는 씁쓸함을 지우기보단 그 자리에서 함께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 그런 단골 가게를, 여행지가 아닌 일상에서 만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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