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미얀마에서 스페인까지

인연이 주는 달콤한 슬픔

by 정담아

마르타. 사랑하는 내 멕시코 친구와 이름이 같은 스페인 여인을 처음 만난 곳은 미얀마였다. 트레킹에서 우연히 한 팀이 되었지만 심한 낯가림과 영어 울렁증을 가진 나와, 늘 곁에 남자 친구와 꼭 붙어 있던 그녀는 가까워질 틈이 없었다. 그렇게 묵묵히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걸었다.


머나먼 우리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던 건 제3의 인물이었다. 같은 팀이었던 유쾌한 프랑스인의 장난으로 식사 시간이나 휴식 시간에 짧은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던 각자의 시간은 점점 가까워졌고, 언젠가부터 나란한 시간을 함께 걷게 되었다. 질척거리는 진흙 위를 뒹굴고 꼬질꼬질한 차림새로 술잔을 기울이며 묘한 동지애도 생겼다. 헤어질 때쯤엔 다시 보지 못할 아쉬움에 서로의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눌렀고, 그때 마르타는 내게 신신당부했다. 스페인 여행 올 때 꼭 연락하라고.


연락을 할까, 말까.


미얀마를 다녀온 지 꽤 시간이 되었는데 나를 기억이나 할지 걱정이 됐다. 인스타그램을 손에 쥐고 며칠을 망설이다 dm을 보냈다. 스페인 여행을 할 예정이라고. 며칠 뒤 날아온 답은 그동안의 고민을 무색하게 했다. 마르타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나의 스페인 여행을 반가워했다. 내게 방문 예정인 도시를 물었고 며칠 후에 도시별 추천 방문 장소와 맛집 리스트가 메일로 도착했다. 현지인에게 받은 찐 정보보다 더 기뻤던 건 마르타의 마음이었다. 일상에 틈을 내어 아무런 대가 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들인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 커다랗고 따뜻한 마음의 마지막엔 이 한 마디가 덧붙였다. 마드리드에 오면 연락하라고.


마르타의 말은 진심일까, 인사치레일까.


여행 중 간간히 dm을 주고받으며 생각했다. 스페인의 문화와 마르타 개인의 성향은 대체 어느 쪽일까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양쪽 모두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에 좀처럼 고민의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국 공은 다시 내게로 왔다. 마르타 마음의 소리가 아닌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나는, 연락이, 하고, 싶었다.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국말로 대화를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마당에 영어로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도 연락을 해보고 싶었다. 이미 한국에서 가져온 전통주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dm을 보냈다. 확정된 마드리드 일정을 공유하고, 시간을 맞춰 식사를 한번 하자고 했다. 일상의 번잡함을 알기에 보채지 않고 조심스레 물었고, 걱정 반 설렘 반으로 그녀의 일정을 기다렸다. 몇 번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마지막 답은 오지 않았다. 떠나기 전날 밤, 캐리어 무게를 한껏 늘렸던 커다란 술병을 열었다. 한국 전통주 대신 스페인산 와인으로 캐리어를 채워야 했기에, 일종의 책임감으로 시작된 술자리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한 번만 더 물어볼까. 너무 눈치 없게 귀찮게 했나.


내 들뜬 마음이 마르타의 일과를 함부로 침해했던 건 아닌지 마음이 불편했다. 내게 베푼 친절을 불편함으로 돌려준 건가 싶어 미안함이 일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소용돌이친 후에야 마음을 정리했다. 그냥 그런 상황이었던 거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은 늘 일어나니까. 인연이라는 건 의외의 순간에 찾아오고, 뜻밖의 순간에 떠나기도 하니까. 마지막 술잔과 함께 마음에 묻은 약간의 비애감과 헛헛함도 털어 버기로 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이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통과하는 건 아님을, 설령 내 선택에 의한 결과일지라도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그래서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의 개연성이 그저 ‘그냥’ 일 수 있음을 이해하니까. 그래서 괜찮았다. 그리고 조금 위로가 되었다. 다시 만날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거라는 믿음이,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분명 인연이었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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