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에 가야하는 이유
단어나 문장마다 품고 있는 온도가 있다. 다만 사람에게 닿는 건 저마다 다르기에,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이 누군가에게는 아무 온기 없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내뱉는 의미 없는 말도 어느 누구에게는 주저하고 아끼는 말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내뱉은 훈기가 식기 전에 상대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타이밍을 살펴야 하니까.
내겐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이 그랬다. 누구나 쉽게 내뱉지만 내겐 결코 쉽지 않은 말. 그래서 누군가 ‘언제 밥 한번 먹자’고 말을 하면 내 대답은 ‘응. 그래.’가 아니라 ‘언제?’인 경우가 많다. 난 당신과 진짜 밥을 먹을 생각이니까. 그래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먼저 내밀기도 쉽지 않다. 그저 스쳐 지나는 인사말이 아니라 정말 당신과 밥을 꼭 같이 먹고 싶다는 의미니까. 그러니까 그 말을 내뱉기 전에 당신과 만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는지, 내 제안이 당신에게 부담이 되진 않을 지 살펴야 하니까. 한번 내뱉고 나면 진짜 밥을 먹기 전까지 마음이 바빠진다. 내가 온기를 담아 던진 말이 차갑게 식어버리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초조함 때문에.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루 종일 찜찜한 기분이 든 건.
우연히 들렀던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J와 약속을 했다. 그날 그곳에서 함께 나누었던 대화 덕에 우리의 인연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되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우연하지 않은 만남을 약속했었다. J가 근무하는 시간에 다시 그 식당에 가기로 했다. 다음 날 우린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로, J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식당은 이미 바깥 자리까지 꽉 차 있었고, 도무지 사람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식당 주변을 조금 서성이다 근처 골목을 배회하며 틈새를 노렸지만 도무지 빈틈이 없는 그곳을 바라보며 전략을 수정했다. 우리에겐 여전히 약속을 지킬 기회가, J를 만날 겨를이 있었으니까. 다음 날 낮에 다시 오기로 했다.
그다음 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정은 바로 J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친구는 이미 J와 사장님을 그린 그림까지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황에 또 한 번 마주했다. 식당 문이 닫혀 있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구글링을 했다. 이게 웬일. 하필 그날이 식당의 휴무일이었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그날이 그라나다에서의 마지막 날이었기에, J와의 약속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침울했다. 다른 식당을 갔지만, 타파스가 나왔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인스타그램에 식당을 검색해보았다. 쉽게 식당을 찾을 수 있었지만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인스타그램 사진만 바라보았다.
미안하다고 사정을 전해볼까? 너무 오바인가?
그래, 걔는 우리를 기억 못 할지도 모르잖아. 그냥 스쳐 지나가는 영업용 멘트였을 수도 있잖아.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몇 번을 마음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 결정했다. 어차피 할 후회라면 해보고 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용기를 내어 DM을 눌렀지만 또 잠시 머뭇거렸다. 나와 그 사이의 적당한 온도를 담을 단어를 골랐다. 며칠 전 방문해 그림엽서를 가지고 이야기했던 한국인 여자 두 명으로 우리를 소개했고, 약속을 꺼냈고, 사정을 설명했다. 혹시라도 기다렸을지 모를 그에게 미안함을 전했고, 제대로 안녕을 고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써 내려갔다. 전송. 내 마음은 보냈다. 역시 너무 과했어, 라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조금 밀려왔지만 조금 더 큰 후련함이 밀려들었다. 딱 맞는 온도가 아닐지라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보단 나을 테니까. 그동안 살면서 전하지 못했던 수많은 마음들을 떠올리며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로부터 답장이 왔다. 친구와 함께 식당에 다시 들렀다. 닫힌 문틈에 친구가 그린 그들의 모습을 넣었다. 그라나다에 꼭 다시 가야할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