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
“짐이 참 없네요. 이렇게 짐 없는 한국 여자분은 처음이에요.”
히말라야 트래킹에서 만난 가이드가 내게 건넨 첫마디였다. 흔히 짐은 여행자의 걱정과 비례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걱정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한 편이고, 그 안에 꽤 많은 걱정이 있지만 여행을 떠날 때만큼은 좀 자유로운 편인 것 같기도 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일상의 부침만으로도 버거운 탓에 별 생각이 없이 여행을 떠난 탓인 듯 했다. 그러니까 짐이라는 건 계획과 맞닿고, 그 계획은 생각과 고민이 낳은 열매라고나 할까. 별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나는 나의 짐은 평균보다 좀 가벼운 편이다.
돌아올 때의 짐은 조금 다르다. 일상으로 복귀하는 자의 짐은 여행지보다 생활공간에 더 가깝기 마련이니까. 늘 내 여행의 마무리는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 돌아가서 해야 할 것들을 끄적이고 꽤 늘어난 짐을 점검한다. 낯선 곳에서의 여운을 켜켜이 정리하면서 익숙한 일상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혹시 빠진 이는 없는지.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캐리어에 넣었다.
여행지에서 어떤 곳을 지나다 문득 누군가가 스칠 때가 있었다. 종이와 지도 같은 멋스러운 지류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에서는 쓸모와 무쓸모에 서성이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친구가 떠올랐다. 장인의 향기가 물씬 풍기며 특이한 초콜릿을 파는 가게에선 달콤함에 녹아내리는 친구가 생각났다. 스페인 남부에서 유명한 셰리 와인을 다양하고 저렴하게 판매하는 가게에선 술과 자유를 음미하는 친구가 보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저하고 망설였다. 혹시 더 완벽한 선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여행 내내 마음속에 적어 놓은 여러 개의 이름과, 더 여러 개의 품목들을 몇 번씩 연결하고 지운 뒤에야 스페인 여행 기념 선물 리스트가 완성이 되었다.
어린 왕자가 그려진 하드커버 노트, 진짜 생강과 민트가 박힌 초콜릿, 드라이 셰리와인과 세미 드라이 셰리와인. 스페인에서 유명한 올리브 오일과 투론 따위까지 담고 나니 듬성듬성했던 캐리어가 금방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무거워진 짐의 무게만큼 걱정도 늘었다.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면 어쩌지, 혹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지.'
어쩔 수 없었다. 세계화 시대에 한국에 없는 걸 찾긴 너무 어려운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이 타국에서도 너를 생각했다는 마음을 주는 거니까. 싫다면 내가 갖지 뭐, 다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이니까. 그건 나중의 문제들이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캐리어 제한 무게 넘지 않기! 꾹꾹 눌러 겨우 닫은 지퍼가 위태로워 보였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저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한창 늘어선 줄 중간에 놓인 저울은 다가가기에 너무 멀었다. 일단 친구와 서로의 가방을 들었다 놨다 수없이 반복하며 대강의 무게를 추측해보았다. 역시 불안했다. 하필 선물로 산 와인과 올리브 오일이 무거운 게 문제였다. 일단 비행기에 반입할 수 없는 액체류는 제외하고 나머지 물건 중에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빼서 가방에 넣고 간단한 먹거리 같은 건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물론 옷은 가능한 많이 껴입은 상태였다. 공항 바닥에서 지퍼 사이로 짐을 넣다 뺐다 반복한 뒤에야 다시 자물쇠를 채웠다. 드디어 저울 앞. 두근두근, 마음을 졸였다. 결과는 3킬로 정도 미달! 성공했다는 기쁨보다는 무게 걱정에 더 사지 못한 선물에 대한 미련이 앞섰다.
열심히 아끼고 마지막에 완전히 탕진해버린 여행 자금에도 텅텅 비지 않고 가득 채운 느낌이 들었던 건, 내 사소한 마음 앞에 환하게 웃어줄 소중한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 덕에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걸음이 조금은 위로가 됐다. 정말 아주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