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나
친구는 바(bar)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이주 간 무수히 들렀던 타파스 바 말고 오롯이 술에 집중할 수 있는 바에. 나는 대답 대신 책을 하나 챙겨 일어났다. 여행 내내 그랬다. 어디에 가든 책 한 권씩을 꼭 가방에 넣었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그렇게 일상의 맥락이 지워진 그곳에서, 어쩌면 가장 나다운 내 모습이 하나씩 드러났다.
주변을 배회하다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갔다. 늘 그런 식이었다. 이곳저곳 구글맵에 저장해둔 장소가 있음에도 그저 발 닿는 대로 걷다 마음에 드는 곳에 불쑥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만난 장소는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그곳 역시 그랬다. 드라이 마티니를 주문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잠시, 같이,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함께 하는 여행에 편안함을 느낌에도 반드시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올리브, 한 잔의 술, 책, 음악. 소박하지만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는 기쁨이 고요히 나를 지나갔다.
나는 먹는 것도 좋아하고,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익숙한 맛도 좋아하지만 늘 선택은 새로운 쪽이다. 익숙한 사람이나 공간과 함께, 새로움을 추구하는 걸 좋아한다.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한다. 다만,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엄청나게 높은 긴장감을 느끼고 쉬이 피로해한다. 그럼에도 그런 만남을 통해 나를 채우고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는 일을, 좋아한다. 더 좋아하는 건 오랜 사람에 대해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더 알아간다는 건 새로움을 의미하니까. 이번 여행에서도 그랬다. 익숙한 친구와 같은 공간에 여러 번 방문해 다양한 메뉴를 시도하고, 그곳의 사람들과 다정한 대화 나누는 게 좋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알고 지낸 친구와 몰랐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모든 감각이 예민한 편이라 고통에 쉽게 노출되지만 그걸 잘 견디는 편이다. 여행 내내 햇볕, 공기, 물, 급격히 늘어난 걸음 수 같이 사소한 많은 변화들에 몸이 다양하게 반응했다. 물론 잘 참아냈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즐거움 하나씩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가령, 천장에서 물이 새면 그 아래 휴지통을 받쳐놓고 똑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캠핑의 낭만을 떠올린달까. 재정적 악조건도 잘 버티기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싶을 만큼 돈을 아끼면서도 가끔씩 비합리적 소비를 한다. 물론 가심비를 생각한다면 매우 합리적인 소비의 결과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매 순간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댔지만 가끔씩 나도 모르게 커다란 지출을 해버리고 웃고 있는 나를 마주했다.
차가운 핫초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나를 만나는 일이 희미했던 나를 더 선명하게 발견한 한 것이라면, 전혀 몰랐던 내 모습을 마주하기도 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던 미술에 대한 심리적 거리를 좁혔다고나 할까. 미술은 학창 시절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었다. 거추장스러운 준비물이나 다 끝내지 못하면 부여받는 과제도 내키지 않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림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미술관을 가는 일도 드물었다. 하지만 미술 전공자인 친구는 내게 프라도 미술관 무료 티켓을 건넸다. 출입문을 통과한 건 순전히 그것 때문이었다.
미리 가이드와 함께 미술관 투어를 했던 친구는 몇 개의 작품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에 얽힌 사연이나 뒷이야기, 작가에 대한 정보, 화풍 따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림이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찬찬히 살피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했다. 친구가 안내해준 경로를 따라 그림 속에 들어갔고, 조금 지나서는 그 손을 놓고 혼자만의 경로를 설정해서 천천히 걸어보았다. 재미, 있었다.
감상에 이어 숙소에서는 실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캐리어에서 수채물감과 붓을 꺼낸 친구의 안내에 따라 스케치에 색을 더했다. 물의 양에 따라 바뀌는 한 색의 농담이, 다른 색과 섞여 만들어내는 빛의 미묘한 차이들이 나를 흥분시켰다. 붓으로 몇 번 터치만 했을 뿐인데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그림들이 순간의 시간들을 모두 빨아들인 것만 같았다. 재미, 있었다. 어쩌면 나는 미술을,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여행에서 새로운 공간과 문화를 만나는 일보다 반가운 건,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를 마주하는 게 아닐까, 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