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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20. 2021

나의 영감님, 카페라떼

의미심장한 한 마디

살다 보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가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내 모습을 용납하기 어려운 지경이 된다. 그 상태가 지속되면 도망만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오직 글쓰기에만 전념하겠다며 2년 간 백수로 살다가 생활비가 바닥 나면서 S사의 사내 카페에 바리스타로 취직했다. 5년 전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 놓은 게 그렇게 쓰일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커피에 대해 조금이나마 상식이 있는 게 도움이 되었다. 고상하고 우아할 줄 알았던 바리스타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사내 카페에서는 ‘빨리 만들어서 빨리 나가는 게 모토’인 만큼 상상 그 이상으로 바쁘고 고됐다. 하루에 천 잔을 판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늠이 되지 않았는데, 막상 천 잔을 만들어보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손목이며 허리가 나가서 약 없이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다. 파스, 근육이완제는 기본이고 한의원으로 퇴근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하루에도  번씩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에 대해서 어떤 의미도 찾을  없었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아침마다 오는 단골 중 유독 말이 없고 낯을 많이 가리는 손님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무표정으로 카페라떼를 주문했지만 그날은 더 쓸쓸하고 우울해 보였다. 마침 줄지은 손님도 없고 해서 그동안은 해주지 못했던 하트를 정성 들여 그려줬다. 커피를 받아서 내빼기 바쁘던 그 손님은 그 자리에서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오늘은 더 맛있네요!"


처음 듣는 손님의 말에 어리둥절해서 대답도 못하고 멀뚱히 있는데 손님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매니저님이 이렇게 맛있는 라떼 한잔 만들어주시고, 그걸 한 모금 마시는 이 시간이요."


머리 한 구석에서 '띵' 소리와 함께 그 손님 뒤 테이블에 노트북을 펴고 앉은 10년 전의 내가 보였다.




한 때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한 적이 있다. 한창 방송작가로 일할 때였는데,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작가 본능을 영화만이 채워줄 수 있을 거라는 왠지 모를 확신이 생겼고, 하던 일을 접고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영상작가교육원에 등록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최소한의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명동의 한 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진 걸 버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그렇게 할 수 있는 내가 기특했다.


초급반에서는 15분짜리 단편영화의 시놉시스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동안 해왔던 일이 10분~15분짜리 코너 영상을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15분 시나리오의 시놉시스를 쓰는 건 정말 쉬울 줄 알았는데 15분이 150분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처음 했다. 비록 15분이기는 하지만 완성된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해야 하는 일이다.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뭘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밤을 꼴딱 새워 간신히 줄거리 한 페이지를 썼다. 제목은 <내 아들 방그레>. 이야기의 내용인 즉 이렇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떼다 천안의 재래시장에 내다 파는 한 상인이 있다. 그에게는 방긋방긋 잘 웃는다고 하여 방그레라는 별명을 가진 아들이 있다. 아버지에게도 손님들에게도 친절하고 상냥한 방그레. 그에게는 아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를 대신해 방그레가 노량진에 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로 바뀐다. 방그레가 사실은 그의 아들이 아니며 친부모가 잃어버린 아들을 10년째 그곳에서 찾고 있었던 것. 드디어 그날 친부모와 아들의 첫 대면이 있게 되고, 그의 과거가 밝혀진다. 10년 전 노량진에서 길을 헤매고 있던 방그레를 납치(?)해 키운 그는 그 후 절대 아들이 노량진에 가지 못하도록 막아왔지만 10년 만에 그렇게 진실이 밝혀진 것이다. 방그레는 친아버지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됐지만 키워준 아버지를 택하게 되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쓰는 동안에는 자화자찬 하며 스스로를 대견해했지만, 시나리오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이 머릿속에 후루룩 지나갔고, 그때부터 부끄럽고 창피했다. 글 좀 쓴다고 생각했던 내가 느닷없는 반전에 말도 안 되는 우연이 겹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쓰다니... 하던 일까지 버리고 택한 영화 이야기꾼의 길인데 쉽지 않아 보였다.


' 이야기를 만드는 재주가 없나? 잘못된 선택일까? 계속해도 될까?'


절망의 늪에 빠졌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6개월, 초급반이 끝났다. 중급반에 가서 글을 계속 쓸 것인지 그냥 이대로 포기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시간이었다. 일단 중급반에 등록은 했다. 대신 방송작가 일도 시작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심산이었다.


중급반에서는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해야 했다. 15분짜리에서 갑자기 100분짜리 영화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것이다. 원고 분량으로만 계산해 봐도 7장에서 80장으로 10배 이상 긴 글을 써야 한다. 장편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미처 몰랐던 나는 2장의 시놉시스를 쓰는데 한 번도 앞뒤가 맞게 쓰질 못했다. 그동안 잘난 척했던 말들을 다시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야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있을까? 영화를 많이 봐야 할까?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할까? 아니면  쓰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데 내가 헛발질을 하고 있는 걸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무엇으로 그 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일단 숙제는 해야겠기에 시놉시스를 제출했다. 제목은 <만지고 싶은 그녀>


정리정돈이 되어 있지 않으면 반듯하게 정리될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른바 강박증 초기 증세를 보이던 현아는 어느 날 일하던 수영장에서 남자의 거시기(?)를 만지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그 증세는 짝사랑하는 남자에게까지 옮겨가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갖가지 방법을 써보지만 증세는 더욱 악화될 뿐이다. 결국 그녀가 찾아간 곳은 '강박증 도움회'. 그곳엔 천장이 무너질까 잠 못 자는 40대 주부, 더러운 것을 못 참아 지나가던 사람이 옷깃만 스쳐도 그 사람의 얼굴을 꼭 확인해야만 하는 20대 청년 등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강박증 환자들이 모여 있다. 도움회 회장이라는 영신은 현아를 돕겠다면서 자꾸만 사람 많은 곳, 특히 남자가 많은 곳으로 데려가는데... 사랑과 강박증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현아. 과연 치료에 성공할 수 있을까?


책 몇 권과 논문 두 편, 다큐멘터리 한 편이 자료수집의 전부였던 이 글은 누가 봐도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초고의 마침표를 찍자마자 창고에 처박았다.  일은 일대로 바쁘고 글은 글대로 안 써지니 점점 자신감과 의욕을 상실해갔다.




얼마 후 멍하니 신촌을 거닐다가 눈에 띄는 카페 하나를 발견해 들어갔다. 오픈한 지 이틀밖에 안 된 곳이었다. 2층에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내부 풍경에 반했다. 짙은 브라운 색 간판과 어울리는 부드러운 브라운 계열의 테이블과 인테리어, 좁은 골목길만 남겨둔 채 꽉꽉 들어찬 대형 카페들과 달리 여유 있는 테이블 배치와 그에 맞는 깜찍한 조명들. 3층은 더욱 맘에 들었다. 천장과 벽과 마루 모두 시멘트의 짙은 회색을 그대로 살리고 그 안에 최소한의 테이블과 책장으로 장식했다.


글을 쓰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예감이 들었다. 창이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키가 10cm도 안 되는 작은 머그컵에 흐트러짐 없이 예쁜 하트가 그려진 카페라떼가 나왔다. 자리로 가서 노트북을 펴고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혀에 착 감기는 부드러운 우유 거품을 마시자 정신이 번쩍 났다.


' 하던 일을 그만두면서까지 시나리오를 쓰려고 결심했지? 글다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잖아. 그런 생각 끝에 만난  영화 시나리오이고.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과 관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안에 펼쳐내고 싶었던  아냐?’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없던 자신감이 불끈 생겼다. 이제는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으면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새로운 시놉시스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가지 않은 길>. 전체적인 구조는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 내재된 나에 대한 믿음, 일에 대한 열정, 삶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는 글. 3시간 동안 꼼짝도 안 하고 시놉시스를 써서 완성했다.


다음 날. 카페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된 사람들의 사소한 대화, 거리에서 들려오는 흘러간 팝송, 거센 바람소리, 신호를 위반한 택시 등 모든 게 눈 안에 담겼다. 그것들은 모두 시나리오의 소재가 되었다. 온 우주가 나를, 내 글을 도와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카페에 앉아 카페라떼를 마시며 씬을 구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첫 씬부터 마음에 들었다.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주인공 재희의 첫 등장이며, 그녀의 심경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씬이다. 다음 씬은 철길 위를 걷고 있는 재희. 멀리서 경적소리가 나는 데도 멍하니 그 길을 걷기만 한다. 암전. 제목 <가지 않은 길>이 호수에 번지는 물감처럼 서서히 떠오른다.


이렇게 쓰기 시작한 시나리오는 일주일 만에 완성됐다. 재고, 삼고까지 하는 데 또 일주일. 2주 만에 맘에 쏙 드는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한 나는 자축하는 의미로 큰 사이즈의 카페라떼를 마셨다. 처음 마셨던 그 맛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영화사 봄'의 시나리오 공모전에 완성한 시나리오를 제출했다. 내 생애 첫 공모전이었다!




왜 하던 일까지 그만두며 시나리오를 쓰게 됐는지 깨닫게 해 줬던 그때 그 카페라떼의 맛. 그걸 잊지 않기 위해 라떼를 마시던 컵까지 사서 간직했었다. 그만큼 본질에 충실하며 글을 쓰는 작가가 되려고 했다. 그랬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글 쓸 시간도 없이 일이 고되다고 무의미하게 흘려버린 시간들. 왜 카페에서 쓸 데 없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냐며 불평만 잔뜩 늘어놓고 살아가던 나에게 손님의 한마디는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내가 만든 커피 한 잔이 누군가에겐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
내가 일하는 시간이 전혀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것. 이 시간 또한 앞으로 쓰게 될 글에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
나아가 내가 쓴 글도 누군가에겐 행복이,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 후로는 손님 앞에서 항상 스마일을 유지했고,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커피를 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 모든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일상이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일하며 글 쓰는 게 가능해졌다. 고마운 카페라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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