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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Sep 30. 2024

아프니까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아프니까 사랑받은 건지 사랑받으려고 아픈 건지

하루 종일 아픈 조카 생각이 났다.

병원 합숙소에 있으면서 통원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작은언니의 아들. 그런 가족을 두고 나만 살겠다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갔다.


내가 아플 땐 다른 사람의 아픔이 작아 보인다. 물론 조카와 언니의 아픔이 절대 작지 않았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지만 아픈 가족을 두고 도망간 내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아프니까 나도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스물아홉 살 크리스마스에 앓아누웠었다.

감긴 줄 알고 동네 병원에서 감기약을 타다 먹고 밤새 끙끙 앓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아팠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아마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땀범벅이 되어 누워있는 모습이 처량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일주일 동안 감기약으로 버티다가 도저히 걸을 수도 없게 허리가 아프고 몸살이 심해서 다른 병원에 가보니 신우신염이라고 했다. 당장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그날로 이대목동병원에 입원했다. 서울에 있는 막내딸이 걱정된 부모님은 당장 집 근처의 종합병원으로 데려가 나를 간호했다. 그때는 스물아홉 살이 아니라 아홉 살로 돌아간 듯 어리광을 부렸다.


아홉 살. 부러진 팔을 수술하고 인생 처음으로 입원실을 경험했던 나이. 아홉 살이었지만 오히려 느긋하고 인내심이 강해 엄마는 내가 아홉 살 같지 않다고까지 했었는데, 스물아홉 살의 나는 아홉 살보다 못한 투정을 부렸다. 나이를 거꾸로 먹나…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한 달 중에 보름을 아팠다. 

심한 몸살은 하루뿐이었지만 그 후로 2주 동안 위경련 때문에 음식을 못 먹었다. 같이 걸으며 친해진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나를 먹여 살리느라 애를 썼다.


음식을 삼키면 위가 조여오듯 아파서 배를 움켜쥐고 30분을 누워있어야 진정이 됐으니 먹는 게 두려웠다. 그래도 길을 걸으려면 먹어야 한다며 그들은 죽을 끓여주고 약을 사다 주고 수지침도 놔주면서 나를 간호했다. 그들의 정성만큼 나을 수 있었다면 백번은 털고 일어났을 텐데 그리 쉽게 나을 병은 아니었나 보다.


자기들만 먹는 게 미안하다며 조금 덜 먹고, 먹지도 못하고 걷는 내가 안쓰럽다며 짐을 들어주고, 걸을 때 외에는 누워만 있는 나를 위해 곁에 있어주었던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나는 아픔에만 집중해 있었다. 아프니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들의 정성이 귀찮을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아픈 동안 그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는데 그걸 몰랐다. 어쩌면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서 아팠던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극도로 힘들었던 때인데…


아홉 살엔 다섯 살에 한 수술이 잘못돼 왼팔 팔꿈치가 툭 튀어나온 게 부끄러워 숨어 다니던 때였고,

스물아홉 살엔 방송국에서 서브작가로 일할 때였는데 사이코 같은 메인작가 때문에 스트레스 지수가 최고점일 때였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마지막 연인에게 받은 상처로 몸과 맘이 무너져 내린 때였다.


누구에게든 기댈 데가 필요한 때에 아팠고,
아프니까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걸 모르고 투정을 부리고
고마운 줄 몰랐으니
참 이기적인 사람이다.


아프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내가 달라 보인다.

미처 모르고 있던 어린아이가 툭툭 튀어나온다. 어린 나는 당연함과 고마움을 구분하지 못하고 제 멋대로 날뛰다가 아픈 게 지나가고 나면 이불 킥을 한다. 고마운 마음을 뒤늦게 고백하기는 부끄럽고 그냥 넘어가자니 미안하고…


몸이 아팠지만 마음이 더 고통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표현에 서툴어 나를 돕는 그들을 외면했다. 




산티아고로 오기 전 언니와 조카를 보러 합숙소에 갔었다. 조카는 면회가 되지 않아 창문을 사이에 두고 멀찌감치서 인사만 했다. 언니에게는 병원비에 보태라며 돈봉투만 건네주고 얼른 돌아왔다. 돌아서 걸어가는 내내 언니는 나를 눈으로 배웅했다.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조카와 언니가 생각난 그날,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한테도 하지 않은 국제전화를 언니에게 처음으로. 전화 연결이 되자마자 눈물이 나서 말문이 막혔다. 내가 한참을 말을 못 하고 있자 언니는 가만히 듣고만 있더니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니지? 갔다 오면 언니가 맛있는 밥 사줄게.”


누구보다 고통 속에 있는 언니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 한마디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식이 아파 억장이 무너져 있는 언니가 겨우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 떠난 동생을 위로하는 게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길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지나가는 순례객들이 내 등을 한 번씩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울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저 멀리 해가 뜨고 있었다. 조카가 얼른 씩씩하게 일어나길, 이모도 빨리 씩씩해질게! 하고 기도했다. 그 눈물에 많은 걸 씻어낸 것처럼 그날만큼은 위가 아파도, 마음이 쓰려도 씩씩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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