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과 여행 갑니다
회사 동료 한 명이 육아휴직 6개월을 마치고 복직한 지 두 달 만에, 아이가 폐렴에 걸렸다.
고작 3일의 휴가였는데 그녀는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남편과 번갈아가며 휴가를 쓰고 있지만,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둬야 할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아이도 중요하지만 제 삶도 중요하잖아요. 이름 불러주는 회사에 오래 다니고 싶은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부모님이 떠올랐다.
그 옛날 ‘육아휴직’은 곧 ‘퇴직’을 의미하던 시절에 우리 네 남매를 어떻게 키우셨을까.
요즘처럼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부모님을 모시고 나가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아빠는 뇌경색 병력이 있어 추위에 특히 예민하시고, 엄마는 무릎 인공관절이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더 뻣뻣하다고 하신다.
그래서 한 시간 거리의 핑크뮬리를 보러 가는 대신 집 근처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 동료 이야기를 꺼냈다가, 자연스럽게 대화는 부모님의 옛날 이야기로 흘러갔다.
두 살 터울의 네 남매를 키우느라 엄마는 한동안 일을 놓고 집에서 부업을 전전하셨다.
그러다 막내인 내가 네 살이 되던 해, 다시 취업을 하셨다고 했다. 아빠의 월급만으로는 네 아이를 키우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열 살이던 큰언니는 나를 학교에 데리고 다녔다.
교실 구석에 앉혀 두기도 하고, 내가 울면 복도에 내놓고 기둥에 묶어두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결국 나는 잦은 몸살로 아프게 되었고, 어린 언니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엄마는 다시 일을 그만두셨다.
일을 놓지 않으려 애쓰셨을 텐데,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둬야 해야 했던 그 마음이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하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도, 육아도 놓지 않으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셨다.
인근 초등학교 교사들의 점심을 대신 해주는 일이었다. 매일 십여 명이 넘는 교사들이 집으로 와 식사를 했다. 어린 나를 곁에 두고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의 하루는 얼마나 고달팠을까.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으려 얼마나 강인함을 장착하고 버텼을지, 짐작조차 어렵다.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면 부모님은 할 말이 많아진다.
그 시절의 힘들었던 일, 그래도 웃을 수 있었던 일들. 그러다 문득, 다 큰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신다.
그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아무리 들어도 부모님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우리는 다 알 수 없다는 걸.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삶의 제1순위였던 그 시절의 부모님에게 고충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날들이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나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곤한 나를 되살리는 자양강장제가 된다.
몸에 좋다는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 ‘애플시나몬티’보다 더 달콤하고 몸을 따뜻하게 덥힌다.
이제 부모님은 일을 내려놓고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시간을 살고 계신다.
아빠는 월남 참전용사 모임에서, 엄마는 성당 봉사활동에서 부지런히 움직이신다.
그곳에는 두 분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
아마 자식들과 있을 때보다 그곳에서 더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시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00씨”라며 이름을 불러드리면, 부모님은 그렇게 행복해하신다.
평생 자식의 부모로 살아오느라 잊고 지낸 이름,
이제는 그 이름으로 기억되는 삶을 사시길 바란다.
남은 세월은 ‘엄마’나 ‘아빠’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으로 웃는 날이 더 많아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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