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흑맥주를 마셨던 날을 기억한다. 10년 전쯤, 1차 회식이 끝난 후 일부 사람들이 퇴근하고 몇 명이 남아 2차로 세계 맥주를 파는 바에 갔었다.
기네스 생맥주 3+1 이벤트 전단지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고 누군가 '기네스 정말 맛있어! 꼭 마셔봐야 할 맥주야!'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회식이니까. 그렇게 맛있다니 한번 마셔나 보자며 시켰다. 흡사 진간장 같은 검은 물 위에 콜라 기포 같은 거품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거품은 소용돌이치며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당시 나의 입맛은 달달한 음료 같은 맥주나 밍밍한 한국 맥주에 익숙했던 터라 기네스는 너무 쓰기만 한 맛없는 맥주에 지나지 않았다. 추천한 사람에게 ‘이런 게 뭐가 맛있냐.’며 핀잔을 줬던 것 같다. 그 날 이후 흑맥주는 나와는 취향이 맞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고 그 이후 흑맥주를 권하면 “전에 마셔봤는데 내 입맛엔 별로더라고.” 라며 나의 경험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다가 작년에 체코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코젤 다크가 캔맥주로 유통되어 편의점에 가면 세계 맥주 4개에 만원 이벤트에 포함되었고 일부 수제 맥주 가게에서는 생으로 판매했다. 하지만 나의 취향은 확고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절대 선택하지 않았다.
흑맥주에 대한 기대감은 없었지만 '생산국 나라에 여행을 가니 한 번은 마셔봐야 하지 않겠냐.'며 생각했고 나의 취향도 한국 병맥주에서 수제 맥주로 옮아 가며 수제 맥주에 관심이 많았던 때였다.
체코로 여행 온 날 숙소 근처 코젤 맥주 직영점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코젤 다크가 워낙 유명하지만 다른 종류도 판매하고 있었다. 다른 종류를 시켜 볼까 하다가 그래도 유명한 건 코젤 다크니 마셔 보자며 가장 작은 0.3L를 시켰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중국인 커플은 가장 큰 1L 시켜서 나눠 마시고 있었는데 그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은 첫 모금을 마시고 깨달았다.
그렇다! 예상했겠지만 첫 모금을 맛보고 코젤 다크는 나의 인생 맥주 1위가 되었다. 동시에 확고하다고 믿었던 나의 취향이 변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쓰기만 했던 그 쌉쌀한 맛이 좋았고 그득한 훈연 향이 너무 좋았다. 그러고 몇 잔을 더 시켜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너무나 좋아서 다음 날에도 갔고 못 간 날엔 병으로 사다가 마셨으니까. 여행 중에 수제 맥주로 유명한 가게에서도 흑맥주를 마셨지만 코젤 다크가 단연 최고였다.
코젤 다크가 좋아진 후 싫었던 기네스도 다시 마셔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희한하게도 그 후 다른 흑맥주도 좋아하게 되어 수제 맥주 집을 가면 메뉴판에 흑맥주가 없는지 꼭 찾아보게 되었다.
모르는 흑맥주가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보통 맥주는 여러 잔 먹으니 첫 잔은 가벼운 라거나 에일로 시작하고 마무리는 흑맥주로 한다. 불행하게도 딱 한잔만 마셔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거의 흑맥주를 마실 정도로 흑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나는 이전에는 절대 선택하지 않았던 코젤 다크와 기네스를 세계 맥주 만원 이벤트에서 먼저 선택하는 선택하는 사람이 되었다. 두 맥주를 상시 냉장고에 넣어두고 위로가 필요한 날 깊고 그윽한 흑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이 경험은 확고하게 나에게 맞지 않다고 믿었던 것도 시간이 지나 변할 수 있으며 때로는 새로운 경험이 싫은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일부도 조금씩 변한다. 과거의 나는 일부는 오늘의 나에게 여전히 존재할 수도, 변하거나 없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과거의 경험으로 나와 맞지 않는다며 기피하기만 한다면 달라진 나를 발견할 기회를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