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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Mar 30. 2024

말의 행복, 말의 불행

부모님은 어떻게 부모가 됐을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부모님의 영향 때문이다. 투박한 말투와 짜증이 배인 행동, 서로의 심기를 거스르는 모습으로 부모님이 불필요한 다툼을 하는 장면을 자주 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농담 삼아 건넨 말들이 대화의 파도를 타고 뒤틀려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갈등의 시작은 대개 어린아이의 장난 같다. 솜 주먹 같은 언어로 서로 잽을 날려대다 누군가 한 방 얻어맞는다. 맞은 사람도, 때린 사람도 '흠칫'하고 놀라지만 그때까지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툭툭. 잽을 몇 방 더 날려본다.

몇 번 맞대결을 펼치고 나면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한다. 작은 상처에 빨간 피가 고이듯 상처 부위는 점점 빨갛게 물든다. 웃음을 띄던 표정도 조금씩 일그러진다.


길남 씨와 미자 씨가 다투는 원인은 주로 '말'에 있다. 상대방의 기분에 대한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내뱉는 말 때문에 그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도 말의 독기에 휘둘려 서로에게 칼을 겨눴다.


싸움은 주로 상대를 비난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당신이 ~해서 내가 ~ 하다" 식의 화법이 갈등을 부추긴 주범이다.

어느날,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온 미자 씨가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보며 한 마디 한다. 길남 씨는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다.

"어휴….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제. 어지르기만 어지르고 제대로 정리하는 꼴을 못 본다"

평화롭게 과자를 먹다 갑작스레 공격당한 길남 씨는 놀란다. 과자 부스러기를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자신을 정리 정돈 하지 않는 사람으로 모는 것은 못마땅하다. 기분이 상해버린 그는 가만히 있지 않고 한 마디를 보탠다.

"와 오자마자 짜증이고... 이 정도면 깔끔하구만"


과자를 다 먹고 잘 치웠으면 좋겠다는 게 미자 씨의 본심이고 먹은 과자 부스러기를 치워야 한다는 게 길남 씨의 생각이지만, 이 시점에서 대화의 포인트는 집이 깔끔하냐 깔끔하지 않냐로 옮겨간다. 두 사람은 복싱 경기를 앞둔 선수처럼 권투 글러브를 매만진다.

"당신이 보기에 이게 깔끔하나. 당신이 어지른 거 내가 치우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맨날 돌아서면 어지르고, 힘들어 죽겠다.""

"내가 언제 맨날 어지르는데. 어제도 다 잘 치웠구먼. 과자도 나중에 다 치울라했는데 괜히 옆에 와서 짜증이고"


이때부터는 언어의 주먹이 목적도 없이 상대방을 가격한다. 맞는 사람과 때린 사람 모두 아프지만, 기분이 풀릴 때까지 일단 주먹을 내지르고 본다는 심보다. 과자 부스러기 갈등처럼 사소한 것에서 촉발된 다툼은 그나마 괜찮지만, 다른 무거운 주제에서 불거진 싸움은 서로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상처는 잘 아물지 않고 후유증이 몇 주씩 가는 경우도 있다.


성인이 되고 난 어느날 나는 부모님에게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 있다. 한쪽의 잘못이 아니라 둘 다 문제가 있는 거라고. 투박하고 거친 표현 방식이 서로를 갉아먹고 있다고. 어린 시절에는 차마 하지 못한, 속에 있던 말을 모두 내뱉었다. 그리고는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취방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뒤 짐을 싸러 방으로 향했다. 와다다 쏟아 낼 때는 몰랐는데 마음에 담아 둔 말이 그동안 꽤 곪아있었던지, 말을 마친 후에는 헛구역질이 나왔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한동안 마음을 추스렀다. 헛구역질을 한 탓인지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혔다.


부모님도 이런 내 모습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그들은 머쓱하게 화해(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를 하더니 나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이렇게 싸워도 서로를 좋아한다고. 부부는 원래 한 번씩 다투는 관계라고. 평소에는 화기애애하게 잘 지낸다고.


서로에게 틱틱 대던 부모님의 말투는 한 번에 바뀌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들의 말다툼을 본 적은 없다. 누군가 맷집 좋게 날아오는 주먹을 맞고만 있거나,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로 살살 펀치를 날리는 게 아닐까하고 추측할 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들은 조금이나마 '잘 싸우는 법'을 터득한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부모님 덕에 좋은 대화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감정을 잘 표현하는 법.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는 법. 다정한 사람이 되는 법. 지금 나의 관심사는 이런 부류의 것들이다. 부모님도 부모님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지금, 먼 훗날 이것도 어쩌면 일종의 '유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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