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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Apr 20. 2024

대학은 사치

부모님은 어떻게 부모가 됐을까

오랜 세월 '뱃사람'으로 살아온 길남 씨의 인생 곳곳에는 바다의 짠 내가 묻어 있다. 사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듯 퍽퍽한 말투부터 가끔 욱하는 성격은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를 닮았다.


평생 블루칼라로 살아온 그에게 '기술'은 권력과도 같았다. 바다 생활과 육지 생활을 아우르며 노동자로 살아온 그는, 자식들이 하루빨리 기술을 배우기를 바랐다. 그에게 기술은 곧 돈이었고, 돈은 곧 행복의 지름길이었다. 당신의 젊음을 팔아 힘들게 모은 돈을 가족에게 꼬박꼬박 전달해야 했던 그에게는 더욱 그랬다.


"빨리 취업해서 장가도 가고 해라 아빠는 너한테 큰 건 못 해줘도 네가 모은 돈은 절대 안 건드린다. 부지런히 모으면 아빠보다 충분히 잘 살 수 있을끼다"

현실적인 길남 씨는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밖에 안 된 아들에게 일찌감치 현실을 가르쳤다.


낭만주의자 미자 씨의 생각은 남편과 달랐다. 그녀는 주어진 현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꿈을 강조했다. 자녀들이 번듯한 4년제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엄마가 빚을 내서라도 너거들 하고 싶은 거는 다 하게 해준다"는 게 그녀의 평소 지론이었다. 자식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은 미자 씨가 가속 페달을 밟아대면 길남 씨는 옆자리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가치관 차이로 인한 소소한 갈등을 봉합하며 지내 온 두 사람이 가장 크게 대립한 일은 내가 고등학생일 때 벌어졌다. 갈등의 불씨는 나의 '진학'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전문대에 진학하기를 바랐고, 나는 이에 반기를 들었다. 4년제 대학 사수를 놓고 한바탕 말싸움이 벌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무사히 가정을 꾸린 아버지 입장에서 전문대 진학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 것이 화근이었다.  


"등록금은 그렇다 쳐도 생활비하고는 어찌 감당할 건데, 졸업하면 취업은 또 언제 할라꼬"

자기 말을 거역한 아들이 괘씸했던 길남 씨는 괜히 으르렁거렸다. 전문대에 간다고 무조건 취업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의 미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일찌감치 요리를 전공했던 형은 당연한 듯 전문대에 진학한 상태였다.


"방학마다 알바해서 모으면 충분히 쓸 수 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면 취업도 빨리할 수 있고요"

평소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다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순간이었기에 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사범대에 진학해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내 최초의 계획이, "임용고시에 합격하려면 졸업한 후에도 오래 공부해야 한다"며 단칼에 거절당하자 잔뜩 독기가 오른 상태였다.


4년제 대학에 가겠다는 아들에게 "방학 때 알바하는 걸로 어떻게 먹고 사냐"며"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 아버지의 모습이 원망스러워 나는 방에서 눈물을 훔쳤다.

'다른 집은 더 지원해 주지 못해서 안달이라던데..'섭섭한 마음에 다른 집과 우리 집의 처지를 비교하는 날이 며칠간 이어졌다.


한동안 아버지와 나의 냉전은 계속됐다. 길남 씨는 자신이 금으로 여기는 '기술'을 아들이 꼭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삶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아버지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추구하는 가치를 양보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대화도 단절하고 서로를 불편해했다.


보다 못한 미자 씨가 해결사로 나섰다. 미자 씨 역시 아들이 4년제 대학에 진학했으면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태도를 못마땅해했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자를 자처했다.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부모님 사이에는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해결사로 나선 미자 씨는 아버지를 고운 말로 구슬리기도 하고 모진 말로 윽박지르기도 했다. 나와 아버지간의 마찰이 부모님의 대리전 양상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어느 밤, 아버지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나를 안방으로 불렀다. 그러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서러운 맘을 숨길 수 없었던 나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불편한 기색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니가 원하는 대로 대학에 가고, 방학 때는 꼭 알바해서 생활비를 벌어라.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장학금도 타서 너도 최대한 부담 안가는 선에서 학교 다녀보자"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이기지 못했다. 그가 모르던 세상을 알고 싶어한 아들의 호기심을 꺾지 못한 듯 보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 속에서 낭만주의자 미자 씨는 길남 씨를 설득하느라 고군분투한 것 같았다.

아버지의 우려에 힘입어 그의 아들은 대학에서 열심히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그가 바랐던 장학금도 몇 번이나 손에 거머쥐었다. 방학 때마다 생활비를 모으라는 그의 조언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길남 씨는 자신의 아들을 꽤 신뢰하게 됐다. 미자 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아들이 '번듯한 대학'을 졸업해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겉으로는 크게 내색하진 않지만, 철딱서니 없는 자식에서 이제는 자기 앞가림은 하는 자식으로 성장한 것이 대견스러운 모양이다.


어느덧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으로 성장한 나로서는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자식이 원하는 삶을 가로막는 듯한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미웠던 마음이 몽글몽글해진 지도 이미 오래 전이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그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아버지가 강조했던 '기술'의 중요성과 주어진 기회를 소중히하는 마음을 부지런히 곱씹으며 살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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