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에 행복 한 스푼> 5화
맛있는 음식이란 무엇일까. 나는 맛있는 음식을 떠올릴 때 맛보다 상황을 먼저 생각한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먹었는지 따위의 것들이다. 늦은 밤 출출함을 참지 못하고 먹었던 치킨, 아빠를 따라 간 새벽 낚시에서 끓여 먹었던 컵라면, 더위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들이켰던 시원한 밀면.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건 일차 방정식이 아니라 고차 방정식이다. 먹는 사람의 상황과 마음, 거기에 음식의 풍미가 더해져 맛있는 음식이 탄생한다.
나는 요리를 좋아하지만 내가 요리를 잘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내 요리는 대부분 나의 입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항상 누군가가 맛을 봐주는 것도 아니고 객관적인 점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요리의 '완성'에 있다. 내가 나의 음식에 바라는 유일한 소망은 그럴싸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내 요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지만, 나는 내 요리가 늘 맛있다고 믿는다. 실제 맛보다는 요리에 들어간 시간과 마음이 과대 평가된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다. 자신을 먹이기 위해 장을 보고, 채소를 다듬어 밥상을 차리고, 내 입을 즐겁게 하는데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을까 싶다. 풍족해진 마음이 조미료처럼 음식의 맛을 더한다.
꼭 내가 만든 음식이 아니더라도 웬만하면 음식의 맛에 불만이 없는 편이다. 매운 음식처럼 못 먹는 음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편의점에서 파는 한 줄짜리 김밥도, 길가 트럭에서 파는 순대도, 아침 식탁에서 나를 반겨줬던 추억의 분홍소시지도 다 훌륭한 요리다. 물에 만 밥과, 그 위에 올라간 김조차 맛있어하는 내 혀에게 나는 매번 감사한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평가가 후한 것은 곧 만족감으로 이어진다. 물렁물렁한 내 입과 마음 덕에 나는 쉽게 만족을 느낀다. 값비싼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가지 않아도, 집에서 끓인 비빔면과 참치 마요네즈 덮밥에 즐거워한다. 잘 차려진 오마카세보다는 김밥, 떡볶이, 오뎅에 더 마음이 간다. 내 '만족감'에 만족하는 스스로가 대견하다.
요즘 음식을 만들다 보니 '맛있음'과 '만족감'의 농도를 공유하는 사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별것 아닌 음식이라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즐거움을 느끼는 그런 사람 말이다. 새해엔 떡국으로 생일엔 미역국으로 서로의 존재를 응원하고, 어쩌다 사 온 붕어빵을 한 입씩 베어 물며 즐거워하는 관계. 내가 바라는 행복은 여기에 있다.
얼마 전, 내가 사는 행복주택의 단체 대화방을 보다가 놀랐던 적이 있다. 단체 대화방 속에 예비 신혼부부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신혼부부들은 결혼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서로 조사한 정보를 공유하며 대화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결혼식장 정보, 헤어, 메이크업 정보, 신혼여행지 정보 등이 대화방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예신', '예랑'이라는 닉네임을 단 그들은 한껏 들뜬 채로 각자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난 그들의 용기가 부러웠다. 이 어려운 시대에 결혼이라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용기. 집을 보유하지 않고도 핑크빛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희망. 저 용기와 희망은 아직 내가 품지 못한 것이었다. 나에게 결혼은 '파인다이닝'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신혼부부가 두 사람만을 의지한 채 오르막길 앞에 기꺼이 섰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내 만족감의 범주에 결혼을 포함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음식에는 그리 쉽게 만족하면서 결혼에는 유독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댄 셈이다. 음식과 달리 결혼은 나 혼자만 만족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변명을 해보지만, 지레 겁을 먹었던 게 사실이다. 물론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상대가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는) 잘 사는 삶, 바람직한 삶, 번듯한 삶에 대한 내러티브가 있다. 좋은 대학 나와서 안정적이고 괜찮은 소득이 보장되는 직장에 취업해 자신과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식이다. 굉장히 엘리트 집단 지향적이다. 표준 자체가 너무 높은 내러티브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하거나 좋은 대학에 못 가면, 가족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건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내러티브와 연결된다. 여건이 안 되는 상태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는다고 하면 책임 못 지는 결정을 한다는 식으로 비판받게 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 많은 청년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가족을 번듯하게 꾸려 잘 살고 있는데도 그런 내러티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게 저출생 현상을 고도로 밀어붙이는 압력을 제공하는 문화적 저변으로 작용한다.
이관후, <압축 소멸 사회> 중에서
그렇다. 나는 은연중에 행복주택에서 살면서 결혼하면 뭔가 부족한 결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의 기준과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단체 채팅방 속 예신, 예랑들의 대화를 보며 나는 그 점이 무척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들이 진심으로 멋있게 보였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좋은 삶도 일차 방정식이 아니라 고차 방정식이다. 돈이 많은지, 집은 있는지와 같은 삶의 여건이 아니라 사는 이의 마음과 행동이 좋은 삶인지를 결정한다. 맛있는 음식의 기준이 사람마다 모두 다른 것처럼 삶의 만족감도 천차만별이었다. 알고 보니 좋은 삶은 맛있는 음식과 같았다. 이렇듯 당연한 사실을 어렵게 깨달아 약간 민망했다.
마음속으로 예비 신랑 신부들의 행복을 빌었다. 그들이 나의 부끄러운 생각을 알지 못하는 게 참 다행이다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가전제품과 침대, 소파에 관한 정보가 마치 탁구를 하듯 대화방을 이리저리 오갔다. 그들의 대화는 예비 신랑, 신부들의 단체 대화방이 따로 만들어지고 나서야 겨우 마무리됐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생각만으로도 내 삶이 한층 더 맛있어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