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도시락

<식탁 위에 행복 한 스푼> 7화

by 스미스

새벽 5시 반, 띠리리링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다행히 출근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이 조금은 느긋했다.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냉장고 문을 연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미리 준비해둔 재료들을 하나씩 꺼낸다. 주방이 넓지 않으니 보조 테이블도 꺼내 펼쳐놓는다.

칼과 도마를 준비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나는 훌륭한 요리사다. 내가 만든 요리는 항상 맛있을 것이다'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과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이다. 함께 먹을 도시락을 직접 싸보기로 했다. 도시락 싸기는 평소에도 잘해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가장 먼저 선택한 메뉴는 유부초밥이다. 도시락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이자, 가장 쉬워보이는 음식. 따뜻한 밥에 양념을 묻히고 유부에 넣기만 하면 끝. 그게 유부초밥아닌가.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뜨거운 밥을 손으로 집어 유부 안에 넣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유부의 살결은 생각보다 연약해서 조금만 힘을 줘도 금세 찢어졌다. 밥을 적게 넣자니 모자랄 것 같아 걱정됐고 많이 넣자니 모양이 엉망이었다. 한참을 조물조물한 끝에, 못생긴 녀석들은 내 입으로 들어갔고 그나마 예쁜 녀석들 몇 개만 살아남아 도시락에 담겼다.


두 번째는 문어 소시지. 비엔나 소시지에 칼집을 내 귀여운 문어 모양을 만드는 메뉴다. 사실 맛보다는

생김새 덕분에 더 인기를 끈다. 칼집을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유튜브에서는 치즈와 검은 깨로 눈을 만들거나, 김으로 벨트를 둘렀지만, 내 투박한 손은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치즈는 주문하는 것조차 깜빡했고, 준비한 재료도 부족했다. 결국 내 문어 소시지는 얼굴 없이 도시락에 담겼다.


세 번째는 김치볶음밥. 도시락에 어울리는 메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튜브 어딘가에서 추천하는 걸 보고 따라 해보기로 했다. 나름의 차별화 전략으로, 두툼한 계란지단이 김치볶음밥을 품은 형태로 만들 계획이었다.

먼저, 계란지단을 부쳐 한쪽에 보관해둔 뒤 김치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몇 번 해본 메뉴라 그런지, 이번엔 비교적 수월하게 완성됐다.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어보니 맛도 꽤 괜찮았다. 이제 남은 건 계란지단으로 돌돌 말기였다.


하지만 역시나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계란은 찢어지고, 옆구리는 터지고, 모양은 와르르 무너졌다. 사고 수습은 늘 그렇듯 내 훌륭한 입 청소기가 맡았고, 살아남은 계란 지단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결국 급하게 계획을 바꿔 김치볶음밥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계란지단을 올리기로 했다.


밥과 함께 먹을 치킨 너겟을 몇 개 굽고, 방울토마토도 깨끗이 씻어 도시락 한 켠에 조심스레 담았다. 수저와 물티슈까지 챙기고 나니, 도시락이 마침내 완성됐다. 쉬울 줄만 알았던 도시락 준비가 끝났을 때,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도마 위에서 야채를 썰던 모습, 김밥 재료를 차곡차곡 쌓던 모습, 그리고 가족들이 그 앞에 둘러앉아 김밥을 나눠 먹던 장면. 어릴 적에는 도시락이 쉽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도시락이 결코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완성한 도시락을 들고 한강으로 향했다. 한강엔 소풍 온 사람들을 위해 텐트, 돗자리, 의자, 보드게임까지 빌려주는 업체가 있었다. 소풍에도 어느새 자본이 침투해있었다. 우리도 작은 텐트와

돗자리를 빌리기로 했다. 예약한 곳에 도착하니 직원이 웬 카트 하나를 건네줬다. 그 안엔 담요부터 휴지, 물티슈까지 없는 게 없었다.

자본이 파고든 건 도시락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가 본 한강 근처에는 먹을 것이 넘쳐났다. 한강 라면은 물론, 햄버거 가게에 각종 꼬치와 핫도그까지. 없는 게 없는 풍경이었다. 심지어 배달을 해먹으라고 '배달존'도 마련돼 있었다.

이런 곳에 굳이 도시락을 싸 들고 온 내가 조금 신기해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문어 소시지에 눈이 없어서, 초라한 내 도시락을 직접

보지 못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본의 힘은 위대했다. 휙하고 던지기만 하면 펼쳐지는 원터치 텐트를 설치하고 캠핑용 의자도 곁에 뒀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햇볕이 강해지면 텐트 안으로 들어가 그늘에 앉았다. 미리 신청해둔 보드게임을 펼쳐 함께 놀았고,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얼음컵과 맥주, 과자도 우리 곁에 있었다. 모처럼 맞는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못난 도시락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좋았다. 수많은 맛있는 음식들 대신 투박한 도시락을 꺼내 먹고 있자니, 소풍조차 자본으로 뒤덮힌 서울 한복판에서 소소한 반항을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서울은 가끔 낯설다. 무엇이든 빌릴 수 있고, 무엇이든 배달되는 도시다. 도시락도, 의자도, 텐트도. 필요한 건 다 구할 수 있고, 웬만한 건 클릭 한 번이면 도착한다. 노력이 돈으로 대체되는 게 당연한 곳.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돈만 있다면 거의 모든 게 해결된다. 소중한 휴식처인 ‘집’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은 참 신기하다. 집마다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은 대부분 1층을 지키고 있다. ‘ㅇㅇ건물 부동산’, ‘○○오피스텔 부동산’ 같은 이름들로. 부산에선 웬만한 대형 주상복합이 아니고서야 이런 ‘건물주’를 직접 마주칠 일은 드물다.


서울 거리에서는 수많은 부동산 간판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이 집이 얼마인지, 저 건물이 몇 억짜리인지 모두가 알아볼 수 있게 널리 알린다. 건물마다 가격표가 붙어 있는 셈이다. 도시 전체가 숫자와 시세로 이루어진 지도처럼 느껴진다.


엄마의 김밥이 다시 떠올랐다. 단무지와 햄, 시금치 같은 재료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고, 김밥의 단면도 반듯하고 예뻤다. 그땐 몰랐다. 그 예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었을지. 손끝이 얼마나 바빴을지. 유부초밥을 조물조물 빚고, 계란지단을 찢으며, 그제야 조금 알게 됐다. 엄마의 김밥은 정성으로 완성된 것이었단 걸.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나는 잠시 멈춰 도시락을 쌌다. 나는 조금 삐뚤빼뚤하고 서툰 도시락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분명 내 손으로 만든 나만의 도시락이었다. 그리고 그 도시락을 함께 나눈 사랑하는 사람과의 하루는, 그 어떤 비싼 음식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도시락을 만들고 싶다. '도시락을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락을 잘 싸는 사람'이 되고 싶다. 꼭 정갈하지 않아도, 꼭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고른 재료로, 내가 만든 모양대로, 누군가를 위해 만든다는 것 그 자체로 소중하니까.


나의 소풍날이면 김밥을 싸던 엄마처럼, 도시락을 나눴던 오늘처럼, 그렇게 마음이 이어지는 순간들을 만들어가고 싶다. 도시락을 준비하던 그 시간만큼은, 바쁘고 각박한 도시 한가운데서도 내 힘으로 하루를 온전히 살아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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