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세계

<식탁 위에 행복 한 스푼> 11화

by 스미스

어릴 적 나는 ‘잡식성’이라 불렸다. 음식에 대해 가리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고기집에 가면 조금 탄 고기쯤은 아무렇지 않게 먹었고,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장난스레 탄 고기를 내게 몰아주곤 했다. 아직 제대로 익지 않아 핏기가 도는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고기뿐만 아니라 상했는지 아닌지 헷갈리는 음식들도 대부분 내 몫이었다. 기미상궁도 아닌데, 나는 ‘잡식성’이라는 별명과 함께 음식을 먼저 먹는 특권(?)을 누리며 살아왔다.


다행히도 나는 탄 음식이나 덜 익은 음식을 먹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튼튼한 신체 기관을 타고난 덕에, 그 별명에 걸맞은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었다. 상하기 직전의 유제품 냄새를 맡고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르는 일 따위도 자연스럽게 내 역할이 됐다. 조금만 유통기한이 지나도 며칠씩 몸이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말하자면 나는 최상‘위’계층의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런 잡식성인 나에게도 손이 가지 않는 음식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못 먹는 것이라기보다, 굳이 먹지 않았던 것들이다. 맛에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입에 넣는 순간 본능적으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음식들. 나는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그 음식들을 피해 다녔다. 바나나 우유와 콩국수가 그 대표적인 예다. 바나나는 좋아하지만 바나나 우유 특유의 향은 싫었고, 콩국수는 콩의 향과 녹진한 국물이 부담스러웠다.


그런 내가 콩국수를 먹게 된 건 군대에서의 경험 덕분이다. 해군으로 복무하며 함정 근무를 할 때는 야식이 기본이었다. 바다 위에서 경계 근무를 서면 근무 시간이 들쭉날쭉해 끼니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몇 시간 동안 바깥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내려와 먹은 야식 콩국수는 내 선입견을 단번에 바꿔놓았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입을 뗐지만, 그때 처음 알았다. 콩국수가 달콤할 수 있다는 걸, 콩으로 가득 찬 국물이 텁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역 후에는 여름마다 이따금 콩국수를 찾게 됐다. 더운 날에 먹는 콩국수는 냉면보다 훨씬 든든했다. 물론 가게마다 맛의 편차가 커서, 여전히 콩 특유의 향이 과한 곳도 있었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음에 드는 집들도 생겼다. 그래도 냉면처럼 그릇째 들고 국물을 끝까지 마시지는 못했다.


김치 역시 내가 멀리하던 음식이었다. 대학 진학 이후 오랜 자취 생활을 하면서도 김치를 내 손으로 산 적은 거의 없었다. 냉장고 안에서 한없이 익어가기만 하는 김치를 떠올리면 부담이 먼저 앞섰다. 집에서 김치를 보내주겠다는 말에도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김치는 썩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대학 졸업 이후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면서 김치의 유용함을 새삼 알게 됐다. 자취 요리를 하는 사람에게 김치는 정말 유용한 재료다. 별다른 반찬이 없어도 김치볶음밥이나 김치찌개 하나면 한 끼가 해결된다. 최근에는 김치를 직접 사 먹기 시작했고, 서울식 김치가 따로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젓갈이 듬뿍 들어간 전라도식 김치를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언젠가는 직접 김장도 해보고 싶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원치 않던 음식과 마주칠 일도 잦아졌다. 회식 자리에서 병어조림이나 민어 같은 생선이 상 위에 오를 때면, 낯선 지형을 앞에 둔 탐험가처럼 젓가락을 들었다. 홍어삼합이나 복국처럼 이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식들도 그렇게 하나씩 접하게 됐다. 맥도날드, KFC, 버거킹만 번갈아 찾던 입맛에도 조금씩 다양성이 더해졌다. ‘잡식성’이라는 별명에 누가 되지 않도록, 새로운 음식 앞에서는 이것저것 시도해 본다.


음식 취향도 늙는 걸까. 아니면 음식에 더 관대해진다고 해야 할까. 먹지 않던 음식을 먹게 되는 일이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김치나 콩국수, 복국 같은 음식들이 예전보다 훨씬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무엇을 못 먹는다고 단정하는 일이 조금 성급하게 느껴진다. 못 먹는다는 건, 어쩌면 아직 충분히 먹어보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집에서 담금주도 만들었다. 더덕과 레몬, 귤이 주인공이었다. 담금주 만들기는 무척 나이 든 취미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의외로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담금주가 생각보다 오랜 숙성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담금주는 시간이 만드는 음식이었다. 올 연말에는 정성껏 만든 담금주를 맛볼 생각이다. 다른 제철 과일로도 한 번 더 도전해 보고 싶다.


최근 유튜브에서 삼겹살에 양파쌈을 싸 먹는 아저씨를 보고 나니,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통양파에 삼겹살과 마늘을 올려 한 입에 넣자, 양파가 콰직 하고 부러지며 바삭한 소리를 냈다. 생양파가 맵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아저씨가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왠지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어른의 맛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상 속 아저씨는 나보다 맛의 세계가 넓은 게 분명했다.


과연 두부와는 친해질 수 있을까. 낙지볶음처럼 매운 음식과는 어떨까. 며칠 전 여자친구와 함께 먹은 닭발이 생각보다 맵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는 소소한 희망을 발견한다. 아직 넓힐 수 있는 '맛의 세계'가 내게 많이 남았다는 사실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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