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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연군 Oct 23. 2020

어느 부기장의 마지막 비행

항공 역사를 바꾼 열두 가지 사건 사고. 네 번째 이야기

"우리 이제 그만 만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였다. 아니 예상은 하고 있었다. 바쁜 비행 스케줄로 만나는 횟수가 줄었고, 점차 내 곁에서 멀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믿었다. 우린 약혼한 사이니까. 다시 돌아올 거라고. 예전처럼 같이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신혼의 꿈을 그릴 수 있을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약혼녀와의 헤어짐에 사로잡혀 당장 내일이 비행인데도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를 나와 부엌 한편에 놓인 우울증 약을 입어 털어 넣고 나서야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비행교육 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우울증 진단을 받고서 이따금씩 먹었던 약이었다. 한동안 약 없이도 정상적으로 잘 지냈는데... 이제는 약기운 없이는 잠에 들기도 힘들 정도다. 


<조종실 출입문 / 출처: 구글>


안에서 잠긴 문

바르셀로나를 출발한 저먼윙스 9525편 기장은 뒤셀도르프 착륙을 20여분 앞두고 요의를 느껴, 잠시 부기장 안드레아스에게 조종간을 넘기고 조종실을 나왔다. 착륙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화장실은 조종실 문 바로 앞에 있어서 1~2분이면 다시 돌아와 앉을 수 있기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철컥]

왠지 조종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평소보다 큰 느낌이었지만 당장의 볼일이 급했기에 신경 쓰지 못했다. 채 1분이 지났을까?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친 기장이 다시 조종실로 들어가기 위해 조종실 문 손잡이를 돌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두세 번 힘들 주어 돌려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안에서 잠긴 문은 꼼작도 하지 않았다.


부기장에게 문을 열도록 노크를 해도 묵묵부답. 문을 발로 차고 소리도 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기장이 욕을 내뱉자 갑자기 항공기가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조종실 내부의 조종실문 개폐 장치 / 출처: 구글>
계획된 항공사고

2015년 3월 24일 알프스 산맥에 추락한 저먼윙스 9525편 사고 당시 기내 상황이다. 프랑스 사고조사위원회에서 블랙박스를 판독한 결과에 상상력을 조금 더 보탰다. 부조종사인 안드레아스는 기장이 잠시 화장실을 나간 사이 조종실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는 항공기를 급강하시켜 144명의 탑승객과 6명의 승무원 목숨을 앗아갔다. 안드레아스가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결과 역사상 최악의 항공사고로 남게 되었다. 


이런 범죄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조종사였기 때문이다. 항공기 조종석은 9.11 테러 이후 외부에서 테러리스트가 조종석에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보안조치가 되어 있었다. 내부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조종실에 발을 들이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게 기장이라도 말이다. 물론 외부에서 우회해서 잠금장치를 풀 수도 있지만, 그 방법도 최종적으로 조종실에서 거부할 수 있기 때문에, 안드레아스처럼 작정하고 문을 잠가버리면 들어갈 방법이 없다.



<저먼윙스 사고의 주범, 안드레아스 부조종사 / 출처: 구글>
급조한 대책

이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 항공사와 항공당국은 발칵 뒤집혔다. 조종사의 자살비행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여러 대안이 나왔다. 우울증이 있거나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은 조종 업무에서 제외한다거나, 조종실 문을 외부에서 자유로이 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거나, 조종실에 감시자를 두어야 한다거나 또는 2명의 조종사가 근무하는 현재의 시스템이 문제기 때문에 이를 바꿔야 한다는 등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무엇하나 명쾌한 답안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조종석에 늘 2명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기장이나 부기장이 잠시 비운 자리를 객실 승무원이 채우도록 말이다. 일종의 감시자 역할인 셈이다. 문제는 조종사가 나쁜 마음을 먹어도 조종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객실 승무원은 이를 제지할 방법도 능력도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장의 해결책에 목말랐던 항공사들은 앞다퉈 이 정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전 세계 하늘 위를 수많은 항공기가 날아다니고 있다. 


테러를 막기 위해 세운 굳건한 문이 테러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버린 이 비극적인 조종사의 고의 추락사고는 근본적인 대책이 없어 늘 위험으로 작용한다. 아마 외부에서 원격으로 조종하는 무인 통제시스템이 여객기에 적용되기 전까지는 해결할 수 없는 항공산업의 난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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