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별책부록>풀들이 보내온 메시지

그림책<연남천 풀다발/전소영글그림>

by 장소영

처음 폴란드라는 나라에 발을 디뎠을 때 생각이 난다.

13시간의 비행을 거쳐 도착한 이역만리 남의 땅!

설렘만큼 두려움과 낯섦도 컸다. 마중 나온 남편 차를 타고 바르샤바 덴베고에 있는 우리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촌 같지 않게 아트막한 전원형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집집마다 잘 가꿔진 정원이었다. 초록 초록한 정원들을 보니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 리는 듯했다.

우리가 살 집에는 기본적인 옵션 살림살이 외에 아직 우리 짐은 없었다. 배를 타고 부랴부랴 여기로 오고 있을 짐은 우리가 도착하고도 2주나 더 걸려 도착할 예정이란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인 테스코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길도 알아두고 동네 분위기도 익힐 겸 걸어가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걸어가면 10분 남짓되는 거리였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천천히 동네 구경을 하면서 걷고 있었다.

"와, 애들아, 여기 좀 봐. 여기에 한국에서 보던 벌레가 있어. 파리, 모기도 있고."

"와, 이 풀은 한국에서 보던 건데... 이 먼 곳에도 똑같은 풀이 있네. 진짜 신기하다."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다 있어. 여기도 똑같지.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남편은 흥분하는 내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이 웃었다.

멍청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난 정말 엄청나게 놀랐고, 무지무지 신기해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익숙함에 살짝 흥분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작은 풀들과 꽃들을 보면서 왠지 그 먼 곳에서의 생활이 견딜만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으로, 학교로 가고 나면, 난 혼자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눈으로 마음으로 그곳의 풍경을 열심히 담았다. 매일 아침마다 집을 치우고 나면, 작은 가방 하나를 메고 집 근처를 기점으로 조금씩 행동반경을 넓혀가며 동네 구경을 하고 다녔었다. 매일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말은 안 통하지만 '진도 부리'라고 인사를 건네주기도 했다. 아마 '저 동양 여자는 매일 어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나는 한국에서 보던 낯익은 풀들과 꽃들을 보면서 타지에서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견딜 수 있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던 풀꽃들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그것들이 내 친구가 되었으니 통성명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핸드폰을 뒤져 이름을 알아냈다. 물론 난 태생이 시골 사람이라 남들보다 많은 풀꽃이름을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애기똥풀, 개망초, 나팔꽃, 바랭이, 강아지풀, 민들레꽃, 질경이, 은방울 꽃 등 길을 걷다 마주하는 그 풀꽃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개망초>

혼자 동분서주하며 바쁘게 생활할 때는, 그 낮은 곳에서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풀꽃들이 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했다. 아니 알았더라도 그때는 나의 눈길과 나의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가만히,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곳에 그 작은 아이들은 누가 봐주지 않아도 늘 거기에 있었고, 항상 열심히 제 할 일들을 하며 피고 지고 있었다.

아주아주 어린 시절 풀꽃 반지와 목걸이, 네 잎 클로버의 행운까지 안겨주었던 토끼풀도, 까마귀가 새까맣게 내려앉은 들판에 너무나 또렷하게 노란 제 빛을 내던 민들레 꽃도.

<은방울 꽃>

낯선 길의 끝에서 하얀색 작은 은방울 꽃을 발견한 날, 그 꽃을 따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힘을 주어 풀꽃을 따 보려는데, 그 작은 풀이 어찌나 단단히 버티던지 줄기가 비틀려도 쉽게 내 손에 딸려 오지 않았다. 그 꽃을 따려고 내밀었던 손이 민망해, 손에 묻은 풀물을 바지에 쓱 문지르고 길을 돌아서 왔던 기억이 난다.

한 없이 약할 것만 같은 그 작은 풀이 무슨 힘으로 그 억센 손길을 거부할 수 있었던 걸까.


아마 한없이 보드라운 봄바람에 폭신해진 땅의 온기와 한 여름의 강렬한 햇살에 타는 목마름을 견딘 땅의 강인함, 잎새들 떨구는 가을의 외로움을 함께 한 땅의 지고지순함과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곳에서 새 생명을 간직하고 있을 얼어붙은 겨울 땅의 단단함을 ,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먼저 고스란히 온몸에 품을 수 있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 늘 있었지만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에 대해 잠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몇 번의 봄과 몇 번의 여름, 가을, 겨울을 어떻게 보내며 살았는지도 모르게 훌쩍 여러 해가 지나버렸다.

이젠 단 몇 걸음도 걷기 싫어 입구 쪽에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 주차를 하고, 호다닥 들어갔다가 볼 일을 마치면 다시 호다닥 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모든 것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 아주 희미한 잔상만 남을 뿐이다.

타지 생활에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그 작은 풀꽃들도 어느 틈에 피고 지는지 이젠 알지 못한다.


그런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발견하고, 다시 몇 년 전 폴란드에서 만났던 그 작은 풀꽃들이 떠올랐다. 난 그때의 기억을 흘려보냈지만 이 그림책 작가는 그림과 글로 남겼다. 내 기억을 고스란히 담아 그려준 것 같아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에 울컥했다. 우연찮게도 작가 이름이 나랑 같다니 이런 우연이 있나 싶다.

<연남천 풀다발>은 전소영 작가의 첫 그림책이다.


<연남천 풀다발 中>

한지 느낌이 보드랍게 손에 전해지는 그림책.

겉표지에 가득 담겨 있는 풀꽃 다발은 늘 나를 달래주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경기도 광주 어느 시골에서 보았던, 무의도 어느 길 섶에서 보았던, 인천 숭의동 작은 골목골목에서 보았던 그 풀들이었다.

내가 보았던 그 작은 풀들을 전소영 작가는 자신이 매일매일 산책하던 홍제천 주변에서 보았다고 한다. 3년 동안 그곳을 지나다니며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던 그 풀들을 정성스레 그림으로 남겼다.

처음에는 그동안 그려왔던 '풀'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까 고민을 하다가, 그림에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써서 그림책으로 엮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다행인지.

전시회를 열고 끝냈다면 난 이 그림과 이 글이 만나지 못했을 테니..

작가의 그림을 내 일천한 어휘력으로 표현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꼭 그림책을 직접 만나보길 바란다.

그림책을 넘기면 작가가 매일 걸었던 홍제천의 가을 모습이 보인다.


모든 것은 가을로부터 시작되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실어 나른다.


모든 풀들은 세상 어느 곳이든 그 누울 자리를 가리지 않는다. '거칠다, 메마르다, 더럽다, 좁다' 탓하지 않고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때를 기다린다. 절대 투덜거리지 않는다.

세상에 자신들보다 잘나고 멋들어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 않을 텐데, 묵묵히 그 자리에서 저마다에게 주어진 계절을 기다린다. 이 세상 이치가 어느 것 하나 이유 없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마냥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주어진 그것을 견뎌낸다. 그리고 결국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누가 먼저 피는지 누가 먼저 자리를 잡는지 풀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이 곳에서
아름답게 피는 꽃을 보면서
나도 힘을 내야지
좁고 오염된 땅에 깊이 박힌 뿌리를 보면서
투정 부리지 말고 지내야지.


풀은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이 잘못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떤가.

남들이 잘되는 꼴을 보면 배 아파하고, 남의 불행을 내 행복 밑천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진 않는가.

내 모습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기보다는 남의 것을 더 탐하는 탐욕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몸을 낮춰 거기 낮은 곳에 있는 풀들을 한 번 보자.


어떤 풀은 뽀족하고
어떤 풀은 둥글둥글하다.
둥근 풀은 뽀족한 풀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연남천 풀다발 中>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 다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저 사람보다 조금 앞섰다고 으스댈 것도 없고, 내가 저 사람보다 조금 뒤처진 것 같다고 축 처져 있을 필요도 없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은 다 다른 거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우린 서로 조금 다른 길에 서 있을 뿐 서로 틀린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덧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언제나 똑같은 계절은 없다.
반복되는 일에도
매번 최선을 다한다.


올해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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